그가 나에게 남긴 것
정말로 M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 적자면 바로 이거다.
죽은 그이가 나에게 남기고 간 게 뭐냐고?
음.... 낡은 타자기 한대와 약간의 빚뿐이었어 그게 다였다니깐
아아.... M 할머니. 이건 동심 파괴 같은 대답이에요. 저는 뭔가 더 심오하고 드라마틱하면서도 감동 감화가 넘치는 대답을 상상했었는데. 나는 속으로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밖으로 말을 하진 않았다.
심지어 M 할머니는 저렇게 말해놓고 혼자서 껄껄 웃기까지 하셨다.
본인이 말을 뱉어 놓고 본인도 웃기신 모양이었다.
M 할머니는 82세? 83세 정도 된 미국 백인 할머니셨다.
감동 감화 넘치는 대답을 한껏 예상, 기대하면서 던졌던 나의 질문은 이거였다.
"남편이셨던 00 선교사/목사님/교수님께서 할머니에게, 이 땅에, 그리고 한국에 남기고 가신 유산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데 저런 대답을 들었다.
M 할머니는 내가 했던 질문의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사 내 영어 말하기 실력이 형편없어서 완벽한 뜻이 전달되지 않았더라도 할머니는 그걸 못 알아들으실 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고 마음의 동무였던 '영숙이'와 맨발로 뒷산에서 뛰어놀던 그런 분이셨으니까.
심지어 할머니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기억도 짐작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태어난 분이셨고 6.25 전쟁 때에도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분이셨다.
M 할머니의 저런 대답은 어쩌면 미국인들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유의 유머 감각(그게 웃기든 안 웃기든 간에. 유머 코드를 도처에 심고 싶어 하는)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평생을 씩씩한 여장부 스타일로 살아오신 할머니의 직설적인 화법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날의 우리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또 생각을 해보면
할머니께서 나에게 나만을 위한 '1대 1 맞춤형 대답'을 해 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나는 그것을 뒤늦게 할머니의 다른 인터뷰를 보고 알아차렸다.
매거진, 웹사이트, 방송국 등에서 내가 했던 똑같은 질문을 할머니께 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그런 매체들을 통해서 할머니가 하셨던 다른 대답들을 나는 종종 읽었다. 그런 인터뷰에서 할머니가 나에게 해 주셨던 대답을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M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는 언제나 나의 외할머니를 동시에 떠올리곤 했었다. 우리가 미국에 오기 바로 전 해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었다. 돌아가실 때 연세가 M 할머니와 비슷하셨다.
M 할머니와는 이런저런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깊이 파고들어 맹렬히 토론할 수 있는 영어 말하기 실력이 그때도 지금도 없기 때문이다.
M 할머니도 당신의 어린 시절, 할머니의 20대, 할머니의 중년, 할머니의 현재 등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총망라해서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해주셨다.
전라도 광주 출생, 평양 외국인 학교 졸업,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예일대학, 간호사가 된 것, 남편을 만나게 된 일 등등 할머니의 82년 인생을 소설처럼 들을 수 있었다.
"예일 대학이라고요? 아니 그런데 왜 다시 한국으로 오셨어요. 그냥 미국에서 떵떵거리고 사시지 않고."
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왔다.
할머니는 그냥 해맑게 웃으셨다.
그런데 말이야. 난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구.
예전엔 다들 타자기를 썼지만 지금이야 누가 타자기를 쓰나.
그래서 나는 컴퓨터를 배웠고 내가 사용하고 싶은 만큼 사용할 줄 알아.
그랬다. 정말이었다. 82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워드를 능숙하게 사용하셨고 이메일 체크와 답장에 아주 빠르셨다. 이메일에 파일을 첨부하거나 사진을 붙여 보내는 등의 작업도 척척 하셨다.
어느 날 할머니는 당신의 '마지막 프로젝트 두 가지'에 대해서 나에게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당신의 일생을 쭈욱 돌아보고 사진과 자료 등을 모아서 글을 쓰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 자손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프로젝트는 아프리카 어느 작은 나라 '말라위'라는 곳에 교실 두 칸짜리 학교를 세우고 싶다 하셨다.
그래서 컴퓨터 다루는 법을 배웠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할머니 본인도 어디쯤 위치하는지 모르는 '말라위'라는 곳에 교실 두 개짜리 학교를 세우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책을 만드는 일은 그 이야기를 내게 해 주셨을 때 이미 절반쯤은 자료가 확보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기자' 였던 할머니의 남편은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목사로서, 학자로서 헌신하며 방방곡곡에 교회를 세우고 고등학교를 만들고 대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셨다. 흑백 사진도 귀하던 그 시절에 칼라 필름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 놓으셨다. 기자다운 면모.
할머니는 남편이 찍어 놓은 그 사진들을 많이 사용하고 싶어 하셨다.
'말라위'라는 곳에 교실 두 칸짜리 학교를 만드는 일은 대부분 온라인 상에서 많은 일이 이뤄지는 중이었다.
그 프로젝트에 몇몇 사람들이 함께 수고를 하고 있었지만 구심점은 할머니셨다.
M 할머니를 옆에서 관찰(?)을 하면 할수록 궁금하고 신기했다.
무엇이 82세 할머니를 움직이게 하는지 알고 싶어 졌다. 할머니는 하실 일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빠 보이거나 피곤해하시거나 시간에 쫓기는 것 같은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할머니 아파트에서 같이 며칠 살아봤다)
오히려 할머니의 일상은 한가롭고 여유로웠다.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요일들마다 루틴이 있고 그 루틴은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변경되지도 않았다. 타운 안의 노인 친구분들도 할머니가 챙기셨다.
10년이 지난 지금.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대구에 묻히신 남편 곁으로 가시지 않고 할머니는 미국에 묻히셨다.
할머니의 책은 인쇄되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이루어졌다. 가족들에게 배포가 되었고
할머니의 가족이 아니었던 나에게도 두 권이 쥐어졌다. 할머니의 책 맨 첫 장에 내 남편의 이름이 나온다.
'말라위' 에는 학교가 세워졌다. 할머니는 한 번도 그곳에 직접 가보지 못하셨지만 할머니의 큰 아들이 그 학교에서 초청을 받아 인사를 전하러 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가 나에게 주신 1대 1 맞춤형 대답의 뜻은 저 사진에 답이 있는 듯싶다.
낡은 타자기와 약간의 빚을 물려받고 할머니는 그 시점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셨다. 할 수 없는 일에 꾸역꾸역 뛰어드신 게 아니다.
14살 어린애와 82살 할머니는 저녁 식사 후 식탁에서 한가로이 게임을 하면 되고
어딘지도 모르는 '말라위'라는 나라에 교실 두 칸짜리 학교를 세우는 일도 털실 인형에 솜을 채우는 일부터 시작된다. (할머니는 이 인형을 $5에 파셨다. 나는 말도 안되는 가격이라고 펄펄 뛰었지만)
그리고 저 순간을 한 장에 사진에 담았던 사람의 역할도 중요했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하면 된다
M 할머니의 목소리가 쟁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