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더 예뻤는데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 우리 엄마가 나에게 읽어 주셨을지도 모르는 동화책들 말고
내가 '자력'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처음 내 손에 들려진 동화책은 총 20권짜리 '어린이 세계명작'이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안데르센 동화, 그림형제 동화 등등 막 섞여있었는데 알록달록 예쁘게 채색된 그림이 페이지마다 많이 들어있는 동화책이었다.
동화책답게 온갖 '공주' 관련 이야기들은 거의 다 들어 있었다.
인어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백설공주, 신데렐라, 콩쥐팥쥐(얘네들은 공주는 아니지만) 등등.
나는 고심 끝에(5살 어린이의 고심) 제일 처음 백설공주를 골랐다.
내가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백설공주는 요즘 예쁘게 다듬어진 백설공주가 아닌 '오리지널' 백설공주였다.
대략 이런 모습의 백설공주.
엥???
피부는 백설처럼 하얗고 머리는 흑단처럼 검고 입술은 장미처럼 빨갛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내 맘에는 썩 와 닿지 않던 백설 공주님.
그러다가 빳빳한 동화 책장을 몇 장 넘기자 드디어 백설공주 아버지 왕의 새 왕비 등장!
이후 백설공주가 왕궁에서 쫓겨나 숲 속 일곱 난쟁이와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은 내 관심 밖으로 많이 밀려나고
나는 동화책을 읽는 내내 왜 백설공주 새엄마 왕비는 백설공주의 미모를 질투했을까 생각을 많이 했다.
다섯 살 꼬꼬마 여자애가 동화책에 나온 그림만 가지고 평가해도 '새 왕비'의 미모는 훌륭했다.
심지어 키도 크고 손가락과 팔의 동작도 우아~해 보였다.
동화책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보는데도 왕비의 몸놀림이 상상될 정도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백설공주보다 새 왕비가 더 예쁘다 라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엄마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냥 그때의 감정을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만일 내가 "엄마, 나는 백설공주보다 왕비가 더 예뻐"라고 말하면 나는 나쁜 '왕비' 에게 동조하는 '나쁜 아이'가 되는 듯 한 느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린애가 뭘 그리도 재고 따지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느꼈으면 그대로 말해도 상관없었을 것을.
하여간 다섯 살에 잃어버린 백설공주에 대한 흥미는 오랜 시간이 흘러 내가 엄마가 된 이후에도 이어져서
나는 내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백설공주 동화책을 읽어 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늘 오후에. 정말 수십 년 만에 어떤 어린아이에게 '백설공주' 동화책을 읽어 줄 일이 있었다. 무려 영어로.
삽화는 수십 년 전 내가 읽었던 그림과 비슷했다. 오리지널 백설공주/왕비 그림은 아닌 약간 변형시킨 것이었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영어로 읽으나 한글로 읽으나 백설공주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답답~ 하고
마법의 거울이 떠들어댄 아무 말 대잔치에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
미모는 역시 새 왕비가 우세.
새 왕비 본인이 이 사실을 진즉에 알아 쓸데없는 질투와 미모에 목숨을 걸지 말고
다른 쪽 재능(화학에 재능이 있어 뵈던데)을 발전시켰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