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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May 27. 2020

쫄딱 망한 그 남자가
제일 먼저 한 일




그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지금 만약 쫄딱 망했다고 쳐요 당장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 남편, 그 남자. 이렇게 세 사람이 각자의 치킨버거 세트를 앞에 두고 막 먹기 시작했을 때였다.

배가 엄청 고팠던 나는 이미 크게 한 입을 베어 물고 와구와구 음식을 씹던 중이라 당장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긴 대답할 말을 생각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우물거리면서 '웅...웅...' 그런 소리만 냈다.



글쎄요.. 먼저는 정리할 것을 정리해야 되겠지요?

남편이 먼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대답이 특이하지 않고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나도 몇 마디 거들었다.

일단은...... 남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얼마인가 계산도 해보고 팔아서 돈이 될만한 것들은 팔고

그것으로 메꿔야 하는 것은 메꾸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남편의 대답보다 내 대답이 조금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얼음이 서걱서걱 들어있던 음료수를 쪼로로록 소리가 나게 빨아들인(이때 나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소리를 내는 것은 에티켓이 아니었기에) 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일 먼저 차를 바꿨어요. 타고 다니던 차보다 훨씬 비싼 차로.
와이프 차도 같은 차종의 색깔만 다른 차로 바꿔 줬어요.

엥?

그 남자의 자초지종 설명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아, 이 사람은 아마도 사기꾼인가 보다' 넘겨짚으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끝까지 들어야지.

갑자기 치킨버거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안녕, 이 사기꾼아' 이럴 순 없잖나.


정말 쫄딱 망했어요.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해봤는데 남은 것이 없더라구요. 엄청난 빚만 고스란히 남았고요. 
어떻게 해야 내가 이 빚도 다 갚고 다시 식구들이랑 제대로 살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지금 하고 있던 일을 끊임없이 계속해서 돈을 벌고 새로운 일을 더 받아서 수입을 늘려 빚 청산을 해야 하는데 나에게 일을 주는 사람들, 나와 거래를 하던 사람들이 내가 망했다는 걸 아는 순간
그 사람들은 내가 하고 있던 일을 빼앗고 다시는 나에게 일감을 주지 않을 것이 확실하더라고요.

@@이가 망했다며? 집도 팔고 차도 팔고 아주 쫄딱 망했다던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가 정말 내가 쫄딱 망한 시점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까만 벤#, 하얀 벤# 두 대를 새로 뽑았어요. 

    

사연을 듣고 나니 이 대화의 초반에  '그럼, 여기서 그만. 사기꾼아'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 말까 망설였을 때보다는 그의 처세가 이해되는 부분이 생겼다. 

그 남자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내 나라, 한국이 아니기에 거기에 걸맞게 새로이 표준화된 '처세술'도 존재한다는 것을 익히 알아가던 참이었다. 

하지만 저런 대처와 저런 처세는 저 사람에게 맞는 해법일 뿐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백 번, 천 번 계산기를 두드리고 조언을 듣고 타고난 성향을 둔갑시킨다고 해도 사람들은 각자 이제껏 해왔던 것 비슷하게 문제를 풀어 나갈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여하튼.

쫄딱 망했다던 그 남자는 그렇게 재기했고 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던 시점에는 망하기 이전보다 더 번창하는 사업을 이끌고 있었다.  고생도 추억이 되니 아름답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요즘 문득 그 남자가 종종 생각난다.

그 남자를 쫄딱 망하게 했던 사건은 '천재지변'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19라는  '천재지변' 급의 상황에 또 놓여졌다. 분명 그 남자도 동일한 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남자에게 '어떠시냐, 지금은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고 계시냐' 안부를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혹여라도

다시금 쫄딱 망했다는 소식도 듣고 싶지 않고

만의 하나

쫄딱 망해버릴 그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식 같은 걸 듣게 될까 봐 두렵다.

그러니 안부를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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