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컷 좀 보소
십몇 년 전 어느 날 아침. 이 나라에 발을 딛은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즈음에.
근심 걱정(오늘은 수업을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으려나 근심) 가득 찬 얼굴의 남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아들 녀석을 학교에 내려주고 집에 돌아와 어수선한 아침 뒷정리를 하려던 그 날 아침.
무심코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 스치듯 "자, 그럼 맨해튼에 있는 본 조비의 무대를 다 같이 볼까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어 잘 안 들리는데 분명히 '본 조비'라는 소리는 똑똑히 들었다.
아침 댓바람에 무슨 본 조비냐. 헤비메탈 그룹이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연도 하나.
뻘쭘한 아침 태양 아래에서 본 조비라니.
흥미롭네 싶어서 집안일을 멈추고 티브이 앞으로 갔다.
그런데 어라, 왠욜.
집채만 한 사자머리를 얹고 헤드뱅잉을 하며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던 본 조비는
티브이에 이런 모습으로 나왔다.
혼자서 '어머나 세상에. 어머나 저게 본조 비래. 어머 본조비래' 이러면서 이 영상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1986년엔 저랬고 2007년엔 이랬다.
21년의 세월은 저랬던 본 조비를 이렇게 변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길고 긴 쿼런틴 생활로 인해 지치고 예민해져 갈 무렵. 몇 달 전.
아침 방송에서 본 조비의 이름을 들었다.
커피를 한 잔 만들어 카우치로 와서 티브이 리모컨을 딱 켰을 때 그의 이름을 또 들었다.
5살 꼬맹이들 zoom class에 나타난 본 조비.
유치원 온라인 수업에 조용필 씨가 나타난 거랑 비슷하려나.
수업을 도와주려 옆에 앉았던 부모들이 난리법석. 정작 수업 당사자들인 꼬꼬마들은 이 할아버지는 누군가?
하는 맨숭맨숭한 얼굴. 재미있었다.
2020년에 마주한 본 조비는 저랬다.
나는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2020년에 마주한 저 사람의 영상을 보고난 후
나도 삶의 어느 부분에서건 아주 미세하게라도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찾고
그것을 위해노력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2020년의 본 조비가 나에게 교훈을 주었다.
덧붙임- 동영상에 보이는 많은 군중들을 보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진다.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다시 저런게 가능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