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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Sep 01. 2020

내 화장품 다 썩겠다

화장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또 못하는 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냐?)

내가 화장을 공들여 열심히 하고 난 후 울럴러러~ 하면서 남편에게 폴짝 뛰어가

"나 오늘 어때? 나 오늘 화장 괜찮나?" 물어보면 대부분 이런 대답을 듣는다


화장한 거야? 

    듣기에 따라서 이 대답은 정말로 긍정적인 찬사일 수도 있다. 

내 화장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당최 화장을 얹은 건지 아닌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착! 자연스럽게 

내 얼굴에 덮였다는 증거일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하는 화장은 무려 37분이나 거울 앞에 앉아 찹찹찹 두드리고 쓱쌱 그리고

문지르고 바르고 했을지언정 전혀 아무런 효과가 없는 무미 무취한 그런 행위였을지도.




화장품이 닳지를 않아서 버린다.

대부분의 내 색조 화장품은 닳지를 않는다. 정말이다. 기적처럼 닳지를 않는다.

쓰다가 쓰다가 쓰다가 지치고 지겨워진 어느 날 마음잡고 싹 다 버린다. 

찔끔찔끔 미련을 갖고 이건 안돼, 이건 괜찮을지도 몰라 이러다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싹 다 버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색조 화장품의 대부분은 남들이 준 것이다. 아마도 내 색조 화장품의 비극은

모두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내가 좋아서 산 제품이 아니라는 점.


누군가 면세점에서 샀다는 제품들 - 몇 개씩 묶어서 파는 것들. 애매하고 난해한 색깔들이 주를 이룸

누군가 자기한테는 맞지 않는다고 나에게 던진 제품들- 꽤나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준다

누군가 자기가 본 제품을 사면서 받은 샘플들만 모았다가 나에게 선심을 쓰듯 던진 제품들

누군가 뜯지도 않은 새것이라며 준 제품들- 화장품 제조연월을 알려주는 앱에 돌려봤더니 8년 전 제품


저런 방식으로 내 손에 들어온 색조 화장품들이니 내 기호에 맞을 리도 없고

나도 그것들에게 애착이 생기지도 않아서였을까. 한 듯 만듯한 내 화장은.




3년 전에 저런류의 화장품들을 싹 버렸다.

말썽 부리는 윈도우 요리조리 살피다가 확 신경질 나면 싹 다 밀어버려! 라며 포맷을 하듯 정말 다 버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거, 내게 어울리는 게 뭘까 궁리하고 고민하면서 즐겁게 몇 가지를 구입했다.

여기까진 참 즐거웠다.

그런데 2년 전 좀 심하게 다쳐서 바깥출입을 못하고 한동안 집에서만 지냈다. 화장할 일이 없었다.

회복해서 밖을 다닐 수 있게 된 후 반찬값이라도 벌어볼까 시작한 일은 곱게 화장을 하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새도우야 미안해.

그러더니 지난 3월부터는 나라에서 법으로 아예 집 밖으로 웬만하면 나오지 말고 다들 집에 있으라고 정했다.

밖으로 나올 때는 얼굴을 마스크로 꼭 가려야 한댄다. 립스틱아 미안해.

나 화장품 왜 샀니.




이제 더위는 물러 간 걸까 싶게 선선한 바람이 불던 오늘 아침.

마스크로 안 가려지는 부분만이라도 좀 예쁘게 해볼까 싶은 마음이 오천 년 만에 들어서 색조 화장품 중 제일 만만한 '쿠션'을 집어 들고 퍼프를 손가락에 끼고 찹찹찹 하려는데 퍼프에 아무것도 묻어나질 않는다.

내용물이 다 말라비틀어져서 스펀지가 퍼석퍼석했다. 아..... 나 이거 스무 번도 안 썼는데.

불쌍한 내 화장품들.

괜히 내 손에 들어와서 빛도 보지 못하고 쓰임도 받지 못한 채 고이고이 썩어가는

가련한 것들. 코로나를 원망하렴.



photo by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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