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독자

by Om asatoma

책을 함께 읽는 것
몸을 나누지 못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체위

그의 손에 따뜻하게 안겨 있는
책을, 빌렸다


꽃비 내리는 날 나란히 걷지도 못할 거라면
그사람 눈길 멈춘 곳에 내가 있고 싶었다
이미 다녀간 곳이어도 남은 온기 있겠거니

나는 본 적 없는 편한 차림으로
트렁크에 백색 런닝만 입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읽기도 했겠지
잠 못 이루는 밤 혼자 깨어서는 밤을 나눈 적도 있을 테지

어느 문장 어디쯤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침표와 쉼표 따라 혼자 호흡 맞추
귓전에 그의 숨소리 맴돌고
손 끝에는 맨드라운 살결
그의 뺨도 가슴도 허벅다리의 안쪽도 더듬지 못할 거라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빠짐없이 샅샅이 핥다며

어쩌다 나타난 그가 그어놓은 밑줄 하나
은밀한 신호라도 되듯 심장이 쿵.

느낀 그대로 느끼고 싶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입술을 깨물고 물은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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