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했던 그날의 기억
'그림은 언어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어요. 언어가 모두 전하지 못하는 것을 그림이 드러내주는 경험을 할 때가 있지요.' 미술 치료 원데이클래스 심리 상담 프로그램 설명에 쓰인 말이었다.
'내가 그린 그림에 뭐가 나오려나?'라는 반신반의한 생각으로 원데이클레스를 신청했다.
그림 그리는 시간 포함해서 한 시간 반 상담에 오만 원이면 한 번쯤 해볼 만한 괜찮은 체험 같았다.
상담 시작 전에 원데이클레스를 신청하게 된 이유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렸다.
"저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싶어요."
"엄마와 기억나는 장면 하나를 그려볼게요." 상담사님이 말씀하셨다.
엄마와 있었던 일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포근하고 편안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다섯 살쯤이었을까? 아빠는 회사에 가시고 엄마는 전업주부로 나와 동생을 육아하셨다. 그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어느 봄이나 가을 날이었던 것 같다. 긴팔 내의를 입었지만 그냥 편안한 온도였다. 거실 조명도 켜지 않았지만 오직 햇살만으로도 꽤 밝았다. 평화로운 이 시간 속에서 엄마는 거실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무릎에 기대었고 나른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걱정할게 없는 낮잠이었다.
난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고, 알록달록하게 색칠했다. '이 그림의 색깔에서 나의 심리가 나올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림은 빠르게 완성되었다.
"엄마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이 뭔가 편해 보이지는 않네요." 그림을 본 상담사님의 말씀이었다.
나는 분명 편안함을 느꼈던 엄마 무릎을 베고 있었던 장면을 그렸는데, 상담사님의 한 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왜 내가 울고 있지? 왜 눈물이 날까?'
소리 없는 눈물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 편안함을 느낀 날 이후의 일화가 생각났다.
일어나 보니 나는 더 이상 엄마 무릎이 아닌 방 안에 눕혀져 있었고, 급히 엄마를 찾았지만 집 안 어디에도 엄마가 없었다. 놀란 마음에 밖으로 나가려고 현관문 손잡이를 마구 돌렸는데 열리지 않았다. (나중에 커서 생각해 보니 잠금장치를 여는 법을 몰랐던 것이었다.)
재빠르게 밖이 보이는 베란다로 가서 창문을 열었고 장난감 상자 위에 올라갔다. 자고 있던 두 살 어린 동생도 나의 행동에 이상함을 눈치채고 내 옆에 따라왔다. 동생을 보면서 나는 몇 초 간 울먹임을 참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고 그렇게 동생과 나는 같이 바깥을 보고 집이 떠날 것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거의 악을 쓰며 계속 울었다.
그러고 나서 이웃집에 커피 마시러 간 엄마가 울음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편안함을 느꼈던 엄마의 무릎에서의 낮잠과 그 이후 일어난 불안감은 너무나 상반되어 같은 날의 기억이 아닌 것처럼 기억되었다.
그날의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았다. 성장해가면서 엄마와 목욕탕에 갔을 때 엄마를 탕 안에서 찾는데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바로 보이지 않거나 마트에 같이 장 보러 갈 때 구경하다가 엄마를 놓치면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무려 스무 살이 훌쩍 넘었을 때까지 그랬다.
상담을 하며 분명하게 느낀 것은 나의 눈물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강한 울림이었다. 이 눈물에 대해서 난 더 파헤쳐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아예 감도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 날로 나는 상담을 10회 받기로 결정했다. 꽤 비싼 금액이었지만 나의 눈물에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무기력한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내가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와 엄마와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