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의 미국 출장기
새해 벽두부터 머나먼 출장을 다녀왔다. (이거 올해도 아무래도 쉽지 않을 삘이지..)
작년에 정말 별의별 곳으로 출장을 많이도 가봤다. 출장 덕분에 몽골과 라오스를 생전 처음 가 봤다.
허구한 날 출장을 많이도 다녔지만, 생각해보니 미국 출장은 꼭 10년만이다.
당시는 1년차 신입이었다. 그 이후 한 번도 기회가 없다가 어느덧 11년차가 되어 10년만에 찾는 워싱턴 DC라니. 출장 따위에 감흥 같은 거 느끼지 않게 된 지 오래됐지만 (출장은 외국에서 하는 일일 뿐..) 10년이라는 숫자가 주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무게감은 괜히 기분을 묘하게 했다.
워싱턴이라는 도시는 나에게 늘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공간이다. 멋모르고 꿈만 있던 20대 시절, 이 도시는 너무나 간절하게 속하고 싶었지만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멀어보였다.
그리고 꼭 5년 뒤, 그 때는 너무너무 멀게만 보였던 꿈을 이루고 다시 찾게 된 워싱턴. 출장으로 시간이 정말 없는 와중이었지만 시간을 쪼개서 백악관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러 갔다.
5년 전, 1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떠나면서 다음에 미국에 돌아온다면 이렇게 별 볼일 없는 학생이 아니라 원하는 꿈을 이뤄 뭐라도 손에 쥔 사람으로 오겠다고 다짐했다.
5년 후 거짓말처럼 꿈꾸던 일을 하게 되었고, 너무 멀어서 감히 마음껏 꿈꿔보기조차 조심스러웠던 자신 없는 5년 전의 바람은 어느새 이루어져 있었다. 춥고 깜깜하고 사람도 없던 12월 어느 밤의 백악관 앞에서 혼자만의 격세지감에 감격하던 20대 후반의 내가 떠오른다.
잘하고 있는가,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내용만 달라진 채 여전했지만, 더 이상 이 도시에서 nobody가 아니라는 것은 조용히 절감하던 순간.
그로부터 또다시 꼭 10년이 흘러 다시 찾은 워싱턴.
그 날은 지난 주말의 폭설로 이틀간의 재택근무령이 이어지고 있던 날이었다.
날은 쌀쌀했고, 눈이 여기저기 쌓여있었고, 도시는 한산했다.
폭설로 인해 원래 예정되어 있던 면담들이 취소되어 도착한 첫날은 예정과 다르게 갑자기 아무 일정이 없는 널널한 날이 되었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시간에 뭘 해볼까 하다가, 15년 전 학생 때 워싱턴에 오면 종종 가던 컵케이크 집이 불현듯 떠올랐다. 레드벨벳 컵케이크가 유명했는데 아직도 있으려나. 구글맵에 검색해보니 15년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성업중인 듯 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거리라 산책 겸 다녀오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다. 조지타운은 여전히 아기자기했다. 낭만적인 추억 여행을 기대하며 나선 산책길이지만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하기에 15년 세월은 지나치게 길었다.
기억나는 곳이 거의 없었고 여기 와 본 것 같다는 어렴풋한 느낌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세월은 그것이 대단히 특별하거나 인상적인 것이 아닌 이상, 아주 많은 것들을 지워놓는다. ‘여기가 이런 길이었나?’ 의문으로 가득했던 산책길..
분명 와 본 곳일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의 허무한 기분.
그래도 컵케이크 집만은 간판을 보니 기억이 났다. 위치도 그대로인 것 같더라. 사거리 길모퉁이에 있었지. 포장 박스도 그대로이고, 레드벨벳 컵케이크도 똑같았다. 조그만 하트 모양 장식까지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변치 않는 클래식일 줄은 몰랐는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이 그대로일 때의 기분은 반가움과 약간의 의아함이 공존하는 것이었다. ’네가 아직도..?‘
컵케이크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는 서점에 들렀다. (영국에 Waterstones가 있다면 미국에는 Barnes&Noble 이 있다.) 새로운 도시에 가면 참새방앗간 마냥 서점에 들어가보는 편이다.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해리포터 1권이 처음 보는 에디션으로 나왔길래 예뻐서 소장용&기념품으로 하나 샀다.
계산을 하면서 서점 직원과 스몰 토크를 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몇 일 출장 왔다고 하니 ‘You live in beautiful country.’였나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 대구에 지인이 4년 동안 살아서 한국에 가봤다고. 이 또한 참 격세지감이다. 15년 전 미국에 왔을 때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 (더 이상 할 말 없음, 대화 단절) 그나마 뭘 조금 더 아는 척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국은 북한이랑 전쟁중인 거 아니냐고 위험하지 않냐고 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당시 나는 가진 것 없고 영어도 서툴렀으며, 끊임없이 나 자신과 내가 속한 나라를 증명해야 하는, 동아시아 어딘가에서 온 학생이었다. 내가 얼마나 큰 꿈을 품고 있든, 그간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든 그런 건 이들이 알 바가 아니었고 드러낼 기회도 딱히 없었고 스스로 어필하는 방법도 몰랐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이 곳에서 나도, 한국의 위상도 달라졌음을 절감한 짧은 순간이었다.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이어서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 모두 헛살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갈 길은 많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정말 수고했다. 그런 마음.
다음날 오전에는 혼자만의 약간의 의식처럼 10년 전에도 찾았던 백악관에 다시 한 번 갔다.
곧 트럼프의 역대 두 번째 대통령 취임식이 있는 날이니 (이제 열흘도 안 남았다!) 백악관 앞에도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ㅋㅋㅋ
세상 썰렁했다. ㅋㅋㅋ
국회의사당 앞을 가봤어야 했나. 사실 워싱턴에서 가장 멋진 건물은 국회의사당이라고 생각한다. 숙소에서 가기 살짝 멀어서 안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쉽네.
백악관은 걸어서 30분 정도라서 역시 걸어서 다녀왔는데, 이틀 정도 거리를 다니며 느낀 바가 있었다.
한때는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만 해도 행복했던 이 도시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큰 감흥을 주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여기.. 진짜 핵노잼이네..?‘ 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10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꿈을 이루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굉장히 새록새록하고 감회가 새로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뽕은 날아간지 오래고 . ㅎㅎㅎ 기억이 거의 희미해져버린 아주 약간의 추억 몇 조각과 현실감각만이 남았다.
지난 세월 동안 많은 경험과 사람과 시간을 거치며, 나의 생각도, 취향도, 하고 싶은 것, 지향, 가치관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예전에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권력지향적이었다. ㅎㅎ 선망받는 자리에 가고 싶었고 권력의 중심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그러한 기회를 가까이에서 보니까 내가 좋아할 일이 아님을 알았다. 들여야 하는 비용에 비해 얻게 되는 보상이란 것이 딱히 나에게 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나는 결국 권력보다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 더 좋았다.
일의 특성상 워싱턴과는 계속해서 어떤 식으로든 엮일 수밖에 없겠지만 - 이제는 이 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 로망은 사라졌다. 원한다면 이 곳에 속할 수도 있게 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 인생이란 게 그런 거겠지.
대신 이제는 나에게 더 맞는 다른 로망을 찾았다.
지금도 여전히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있지만, 또 알겠나- 5년 후 10년 후 그 자리에 있을지.
젊은 시절 야망의 도시를 다시 찾아,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야망마저 쿨하게 내려놓고 신나게 돌아온 워싱턴 출장기 끝!
(그러나 인생이란 또 알겠는가, 언젠가 다시 꺼진 줄 알았던 야망이 타오르게 될 지! 그게 지금은 아니란 건 확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