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친구가 없으면 죽는 줄 알던 시기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초, 중, 고 때는 친구가 삶에서 거의 절대적인 비중이고 (학교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친구와 싸우기라도 하면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친구와 언제까지 모든 걸 함께 할 수는 없다고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은 고3 때였다.
1, 2학년 내내 같은 반을 해서 가장 친했던 친구 두 명과 3학년이 되며 나만 반이 달라지고, 고3의 학업 스트레스, 조급함, 각자의 학원 스케줄 등으로 예전처럼 많은 일상을 공유할 수 없었다. 그때는 서운함과 충격이 컸지만, 당연히 10대의 성장통 같은 하나의 과정으로 지나갔을 뿐이고, 그 친구들과는 지금도 잘 지내며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대학교 때, 그리고 20대 때 만나서 ‘우리 만난 지 이제 5년 됐어~ 헐 우리 이제 10년 지기야, 시간 미쳤다 ‘
그런 얘기들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귀엽기 그지없다 ㅋㅋㅋㅋㅋ
이제 세는 것도 무의미하지만, 헤아려보니 20년 지기다.
아마도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지금을 회상하며 그때 우리가 만난 지 20년 됐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며 우습다고 하겠지.
그 친구들과 헤어지고(?) 대학에 가서 친해지게 된 친구들도 있다.
처음 대학에 가면 학부별로 OT니 새터니 그런 것들을 가게 되는데, 그런 행사에서 어쩌다가 함께 친해진 5명이 많이 같이 다녔다.
왜 친해졌더라.
솔직히 이제는 그들과의 첫 만남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한 명은 내가 먼저 말을 걸어서 친해지게 되었으니 기억나지만, 어떻게 우리 5명이 뭉치게 되었는지는 계기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와는 아마도 새터에서 같은 조를 해서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는 개강총회 때 한 테이블에 앉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각자가 친해진 한 명 한 명을 서로 또 소개해주다 보니까 어느새 5명이 뭉치게 되었던 거겠지.
뻔하디 뻔한 그런 이유겠지만, 뭐가 됐든 아무튼 기억은 없다. ㅋㅋㅋ
어쩌다가 우리가 15년이 넘은 시간 동안 연락을 이어가며 만나고 있을 정도로 오랜 사이가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 때 그 친구들도 좋긴 했지만, 약간… 내가 가장 순수했을 때 했던 첫사랑을 못 잊는 마음 같은 것처럼(?), 다음에 만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그 정도의 마음은 안 생기는 것처럼(?) 그 당시에는, 고등학교 때의 내 친구들이 더 ’ 찐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친구들에게는 크게 마음을 주지 않았었다. 대학 때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늘 했던 말이 ’역시 너네랑 노는 게 재일 재밌어 ‘ 였다.
생각해보면 그때 대학 친구들을 나는 ’시절 인연이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서운해할 테니, 그 친구들에게는 무덤까지 비밀로 할 거다 ㅋㅋ 이 글을 친구들이 볼 일은 없겠지! ㅋㅋ)
대학 졸업하면 각자 다른 일을 할 테고, 우리를 한 곳으로 묶어줬던 학교라는 공간이 사라질테고, 그렇게 연락이 뜸해지다가 멀어지는.
동아리를 같이 해서, 아니면 조모임을 같이 하거나 같이 공부를 해서 잠깐 친하게 지냈지만, 시절 인연으로 끝난 친구들도 실제로 많았으니까.
그러나 결국 그렇지 않게 된 데에는, 솔직히 친구들 덕분이 컸다.
뭐랄까.. 내가 이 친구들을 좋아한 것보다 이 친구들이 나를 더 좋아한 것 같다? ㅋㅋㅋ
사실 멀어질 수도 있는 계기는 많았다.
친구들은 학교 열심히 다니고 있을 때, 나는 혼자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3학년 때 1년 훌쩍 미국으로 떠나버리기도 하고, 돌아와서는 시험 준비하겠다고 3년 휴학해버리고 ㅎㅎ
그 사이 친구들은 각자 혹은 같이 졸업사진을 찍고 (대학 때 졸업사진 찍기.. 나름 이벤트였다.. 심지어 휴학하거나 졸업 미룰 거면서도 친구들이랑 같이 졸업사진 찍을 거라고 졸업 안 하는데 졸사만 신청해서 찍기도 했음 ㅋㅋ 타이밍이 친구들이랑 어긋나면, ‘친구도 없는데 뭐’ 하면서 졸사 안 찍는 사람도 많았음 ㅋㅋ)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내가 시험을 마치고 복학을 했을 때는 아무도 학교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졸사 혼자 찍음 ㅋㅋ)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사실 할 생각도 딱히 없었으니) 그렇게 멀어질 수도 있었으나, 친구들이 잊지 않고 나를 꾸준히 챙겨줬다..!
친구들과의 모임에 내가 못 나갈 때가 많았는데 꼬박꼬박 우리 오늘 만났다, 보고 싶다, 다음에 같이 보자 등등 메시지도 해 주고!
안 올 걸 알면서도 매번 올 수 있냐고 연락해주고.
(나였다면 이 친구는 바쁘니까, 하고 굳이 연락을 안 했을 수도)
나는 사람을 참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누군가에게 먼저 안부 연락, 선물하기, 생일 챙기기 이런 걸 너무너무너무 귀찮아한다. 해야겠다는 생각만 해도 약간 스트레스랄까.
그래서 전혀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찐친이어도 생일 축하 메시지 한 번을 안 보낸다.. 오히려 차라리 일로써 필요하면 보냄 ㅋㅋㅋ 상사 생일 축하 메시지 이런 거 ㅋㅋㅋㅋ
내가 안 하니까 당연히 누가 나한테 해주는 것도 절대 바라지 않는데 (심지어 어떨 때는 ’나한테 이런 걸? 굳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ㅋㅋ 그치만 이제는 나이 먹고 성격이 좀 둥글어져서 그냥 다 좋게 생각함)
기대하지 않은 애정을 그 친구들로부터 받은 셈이다. 그것도 5년 이상 한결같이?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친구들의 정이 새삼 고마워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람이란 점점 더 귀해지기 마련이라 어느 순간부터는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중 한 친구는 내가 영국에 있을 때 놀러와서 우리집에 있으면서 같이 노르웨이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고, 바로 지난 주말에 그 친구들 중 두 명을 같이 만났다.
나머지 둘은 왜 없냐고? 한 명은 사실 남편 유학으로 몇 년 전부터 캐나다에 살고 있어서 만나지는 못 하고, 한 명은 나오려 했으나 아기 둘 엄마인 관계로.. 아직 1살인 막내가 갑자기 아파서 당일에 못 나온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전과 똑같이, 못 나온 친구들에게 우리의 모임 사진을 공유하고,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못 봐서 아쉽지만 괜찮다고 하고, 다음에 또 만나자고 이야기 한다.
예전엔 내가 그런 말을 듣는 쪽이었다면, 이제는 하는 쪽이라는 것만 달라졌을 뿐. (아 그런데 내가 얼마전까지 영국에 있었으니.. 불과 얼마 전까지도 여전히 듣는 쪽이었네 ㅋ)
언제든 모든 것을 공유하고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나는 진정한 친구가 없는 건가..? 그런 친구 하나 못 만들고.. 나 인생 헛살았나..?라고 20대 초반에는 고민도 했었다. ㅋㅋ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내가 진짜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 온 친구들은 오히려 한참 안 봐도 불안하거나 서운하지 않은, 그러나 언제든 연락하면 또 마치 어제도 만났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친한 듯 안 친한 듯 한?? 관계들인 것 같다.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으니 실망할 것도 없고, 어찌 보면 정이 없는 친구 관계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끼리는 아무 문제가 없는 관계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도 많이 달라졌다. 대학 때는 연애, 진로와 취업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 건 당연한데, 의외로 추억팔이를 또 그렇게 많이 했다 ㅋㅋㅋ 우리 그때 뭐 했잖아, 저번에 거기 가서 뭐 먹고 어디 갔잖아, 야자 튀다가 누구누구 선생님한테 걸려서 발바닥 맞았잖아 뭐 이런 이야기들. 그때는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의 경험이 많았고, 아직 그 기억이 생생할 때라서(…) 가능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졸업하고 함께하는 공통의 경험이 없어지면 우리가 계속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고, 실제로 다들 사회생활 초반에는 예전과 달리 이제 나에게만 고유한 이 경험들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약간 난감해하거나 말을 아끼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다들 직장생활이 익숙해지고 나니까 웬걸 ㅋㅋ 예전에 하던 추억팔이 공통의 경험보다 할 이야기가 더 많다 ㅋㅋ 공통의 경험은 어차피 과거를 파먹는 거라 한계가 있는데 이제 서로 다 다른 생활을 하다 보니 얘기할 거리가 더 많음 ㅋㅋ
언젠가 멀어질 관계라고 생각했던 관계가 지속되는 경험, 처음의 애정도가 시간이 지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이라는 새로운 인생 챕터를 시작하며 나도 모르게 친구에 대해 또 한 번의 벽을 쳐놓았다.
즉, ‘사회 나와서 만난 사람들하고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때뿐이지 장기적으로 지속하는 친구 같은 관계는 못 될 거다’
사회 모임의 특성상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만나게 되는 건데 한두 번 봐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울뿐더러, 혹시나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공짜가 없는 세상에(?) 그냥 너랑 친해지고 싶어요 하며 다가간다거나 개인적으로 따로 연락을 취하면 당연히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지?라고 지레 짐작하고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친해질 마음이 없으니 아무도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 내 편견을 깨 준 것이 독서모임 멤버들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위와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기에 오랫동안 같이 모임을 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연락하거나 만나는 일은 한 번도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모임 멤버와 모임 외로 따로 한 번 만나게 됐는데, 내가 그 제안을 받았을 때 전혀 싫은 마음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그 사람에게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사람인데 먼저 연락을 하는 수고를 하고, 제안을 하고, 시간을 내다니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계기로 ‘아, 나도 개인적으로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냥 이야기해보면 되는구나’, ‘어차피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닌 건 몇 번 만나면 이 사람도 알 텐데 왜 혼자 지레짐작하고 부담스러워하겠지 방어적으로 생각했을까’ 하고 생각을 바꾸게 됐다.
그 경험 덕분에 영국에 가서는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상대방에게 다소 거리낌 없이(?) 먼저 그냥 연락을 했다. ㅋㅋㅋ 내가 그런 제안을 받을 때도 마다하지 않고 잘 만났다. 그렇게 해서 사실 그때의 궁금증만 해소하고(?) 더 지속되지는 않은 관계도 있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레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속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싶은 관계도 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친구 관계를 만들면서 느낀 점은, 학생 때는 확실히 주어진 환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가깝게 보게 되는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면, 사회에서의 친구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선택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더 알고 싶고,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느꼈던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하고 인생의 방향성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노력하는 사람, 함께 했을 때 나도 배울 점이 있는 사람, 에너지를 받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지속되는 관계로 남은 사람들은, 그들 또한 나에게서 그런 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혼자서도 잘 놀고, 애초에 타인에게 무언가 크게 기대하지 않는 성향의 사람인지라 ‘친구’의 중요성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할 수 없다 의 느낌이랄까.
그래서 성인이 된 후로는 애써서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해 본 적도, 멀어진 관계를 아쉬워해 본 적도 없다.
친한 사람이라 해서 살갑게 잘 챙기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맙게도 나에게 먼저 다가와주었던 친구들,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런가보다 하고 신경 쓰지 않고 기다려주었던 친구들,
멋모르고 만났던 어린 시절과 달리 각자의 세계관이 어느 정도 확고하게 완성된 채로 만났어도 서로 공명하는 부분이 있어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는 친구들
처음에 내 애정의 크기는 솔직히 다소 작았을 수 있겠으나 (타인에 대한 애정의 디폴트값이 아주 크지 않은 사람이라..) 이제는 축적된 시간 때문에 애정의 합계가 커진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이다.
여전히 내가 이들에게 대단히 뭘 해 주겠다고 할 자신은 없고 사실 할 마음도 없지만 ㅎㅎ
계속 이렇게 가끔씩이라도 만나서 좋은 말과 기운을 주고받는다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