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느 3시간전

11월 회고

귀찮아도 월간회고를 해야 하는 이유

벌써 11월 회고글을 적을 때가 되었다니.


일전에 회사 상사 분이 ‘하루 하루는 영원처럼 길고 고통스러운데, 한 달, 1년은 찰나 같다’ 라고 하셔서 정말 무릎을 탁 쳤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맞는 말이다.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렇다.


11월도 거의 다 가고 연말이다보니 어느새 올 한 해를 돌아볼 때쯤 되었는데, 느리게 추워지는 올해의 날씨 때문에 지금이 11월이라는 기분도 크게 느끼지 못 했다보니 더 갑작스레 연말을 맞이하는 느낌이다. 나의 마음은 여전히 거의 9-10월쯤인데 곧 12월이라니.


충격과 놀라움으로 시작해보는 11월 회고.




1. ’마이너스의 손‘


’마이너스의 손‘ 이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우리 회사에서는 이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늘 일은 많은데 일할 사람은 부족해서 허덕이다 보니, 일을 없애는(?) 사람이 환영 받는다.


11월은 기대도 안 했는데 나에게 ’마이너스의 손‘이 강림한 달이었다. 11월 전까지는 올해 온갖 일이 쏟아져서 너무 힘들었고, 소진되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뻗어 있던 시간(8월..)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 달에는 일이 나에게 오면 없어지더라.


11월 첫째주에 갑자기 2-3일 내로 해외 출장 갈 뻔 했는데, 상대측에서 일정 조율이 안 된다고 해서 안 가게 되어 얼마나 쾌재를 불렀던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통쾌하다. ㅋㅋ


하나 더 있다. 자료 준비할 것도 많고 손이 많이 가는 3자 회의도 이번달에 갑자기 주최할 뻔 했는데 (내 담당임..) 이 또한 상대측에서 못 온다고 하는 덕분에 무산되었다ㅋㅋ


없던 일도 생기면 내가 하고, 남의 일도 내가 하고, 누가 할 지 애매하면 당연히 내가 하는 시간들을 보내면서 버거웠던 순간들이 많은 한 해였는데, 11월은 그동안 고생했다고 주어진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ㅠㅠ 야근도 올해 들어서 가장 적게 한 것 같다.




2. 가을 나들이, 부모님과의 시간에 대한 생각


일이 여유로워서 11월 주말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11월 주말 중 하루는 큰 아빠의 횡성 전원주택에 가족들 다함께 놀러갔다. 서울을 벗어나니 확실히 여유롭고, 공기도 좋고, 당일치기였지만 배불리 먹고 여유롭게 잘 쉬고 온 하루였다. 10월은 다이어트를 한다고 양이 많이 줄었는데, 11월부터 야금야금 먹는 양이 늘기 시작해서 이 때 아주 정점을 찍었던 것 같다. ㅎㅎ

요즘에는 식사량을 조금은 조절하고 (다이어트 때만큼 줄이진 않지만) 운동도 다시 사부작 거리며 하고 있다. 그래도 한참 빠졌을 때보다는 뱃살이 조금 붙어서 몸이란 참 잔인하게도 정직하군 싶다. (움직이면 또 정직하게 빠지기도 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또 다른 주말 중 하루는 단풍놀이를 가보자며 뮤지엄산에 다녀왔다. 단풍철이 살짝 지나긴 했지만 날씨가 맑아서 좋았고, 미술관 공간도 예뻤다. 입장료가 꽤 비쌌는데, 연간권을 끊으면 3번만 가면 이득이라 호기롭게 연간권을 끊었다. 큰 아빠의 횡성 전원주택과는 30분 거리라서, 다음번에 횡성에 놀러갔다가 계절마다 또 들르자고 다짐했다. 그게 불과 지난주 일인데, 글을 쓰는 지금 그마저도 왜 이렇게 한참 옛날 일 같은지. 정말 하루하루는 영원 같은데, 한 달은 금방이다. 이 알 수 없는 시간 감각. 미스테리다.


주말에 쉬고 있어도 회사에서 연락이 올 때도 있고, 내가 굳이 집으로 싸들고 온 일이 있어서 ’저녁에 가서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에 주말에 놀면서도 맘이 편치 않은 적도 많았는데 (단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은 없는 건 안 비밀 ㅋㅋㅋ) 이 날은 모처럼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온전히 놀았던 날이다.


그리고 예전엔 정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엔 문득문득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모님과 건강하게 함께 시간 보낼 날들이 생각보다 얼마 안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분이 그렇다는 거고 여전히 많이 남았을 수도 있지만..) 돌아보면 부모님의 40대, 50대 시절이 정말 얼마 전 같은데 60대에 접어들어 이제 70대에 가까워지는 나이라니..

10년, 20년 뒤에 이번 달의 이 시간들을 마치 어제 같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별것 아니라고 느끼는 시간들이 나중에 되돌아보면 오래 가는 기억이 되는 것 같다.


사실 이번달 2주 연속 부모님과 주말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꽤나 버겁다고 느끼고 이번주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푹 쉬어야겠다 생각했는데, 회고글을 적다 보니까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잊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 이래서 돌아보기가 중요한 것 같다.


앞으로만 내달리지 말고, 멈춰서서 돌아보는 시간도 빼놓지 말아야겠다.




3. 아이돌 덕질도 안 해 봤는데 발레 덕질을 하네 - 새벽 6시반에 예당 줄 서 본 썰


천성이 게으르고 집요하지 못 해서 덕질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누군가를 흠모하는 것보다 나한테 관심이 더 큰 철저한 개인주의자라서 학창 시절에 한 번쯤 거쳐가는 아이돌 덕질도 안 해봤다. 좋아하는 가수는 있었지만 소식을 다 팔로업하고 굿즈를 사고 콘서트를 가고 할 정도로 걍 그렇게까지 관심이 안 가….


그런 내가 인생 처음으로 공연 티켓을 구하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봤네.. ㅋㅋ


국립발레단에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박세은과 마린스키 발레단의 김기민을, 최애작 라 바야데르 주연으로 섭외해왔는데 이 조합 어떻게 안 봐….


지난달에 매진 공연의 취소표를 3번이나 줍줍해봤기에 이번에도 호기롭게 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와 …. 이 공연은 진짜 쉽지 않았다. 수시로 예매 사이트에 들락날락도 해보고 무한 새로고침 노가다도 해봤지만 티켓 확보에 실패해서 ‘아 이제 나의 운이 다한 것인가. 이번은 정말 안 되는건가?’ 했는데 우연히 공연 당일에 현장에서 시야제한석을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생 다시 없을 공연일 수도 있는데 밤 새는 것도 아니고 몇시간 줄 서는 것 쯤이야.. 무조건 가야지…


티켓 판매가 선착순이기 때문에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했다. 몇시쯤 가야 하나 눈치를 보다가, 2시 공연이니까 최소 7시 전에는 가야 할 것 같다는 감에.. 6시 동도 안 튼 새벽에 택시를 불러 잡고 예당에 가서 아직 열지 도 않은 문 앞에서 6:40분부터 줄을 섰다.ㅋㅋㅋㅋ 그 때 갔는데도 내 앞에 이미 20명 넘게 서 있었다는 거. 역시 사람들은 대단해..


나중에 번호표를 나눠준 걸 받고 보니 29번이었다. 시야제한석이 162석이라고 하고, 1인당 티켓 구매가 4장까지 가능해서 완전 안정권이었다. ㅎㅎ 일찍 일어나는 새는 벌레를 잡을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해서 본 공연이 좋았냐고?


헤헷 말해 뭐해..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 기대했던 만큼 ‘미쳤다, 찢었다!!!’ 막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박세은과 김기민은 당연히 너무너무너무 훌륭했는데, 이제는 너무나 슈스가 되어버린 두 월드스타를 담기에는…. 예당이 너무 작았다 ㅠㅠㅠㅠ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못 가봤지만 마린스키 극장은 가봤기에..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도 가봤기에.. 이들의 퍼포먼스가 그 곳에서였다면 얼마나 더 빛났을지가 이미 그려지기 때문에 약간 아쉬움은 남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공연의 여운이 진짜 오래 갔다. 끝나고 나서도 좋은 공연은 흔치 않은데 이 공연은 그랬다.


어쩌면 이 둘의 조합을 보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둘이 현역 무용수로 언제까지 공연을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둘이 같이 한국에 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내가 그 때 한국에 있을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새벽부터 줄을 서도 그 시간과 체력이 1도 아깝지 않았다. 시야제한석 치고 자리도 꽤나 좋아서 (내가 꽤 앞번호였기에 가능했겠지! 자리 선택도 선착순이었다. ㅎㅎ 좋은 자리부터 빠짐..) 객석에 앉자마자 ‘헐…나 너무 잘 했쨔나!!’ 하면서 셀프 극찬을 했더랬다 ㅎㅎㅎ 자기애 샘솟음 ㅎㅎㅎ


공연 보고 나니까 ’아 이걸 봤으니 난 이제 여한이 없다. 내일부터 어떤 빡치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괜찮다. 나는 김기민과 박세은의 라바야데르를 본 사람이니까 ㅎㅎㅎㅎ‘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잡은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도 많이 더해진 효과일 것이다. 실제로 이 뽕이 3일 이상 갔던 것 같다. 1주일 정도 되니까 흐려지긴 했는데, 회고글 쓰면서 다시 떠올리니 역시나 또 행복하다.


다음의 목표는, 김기민이 은퇴하기 전에 마린스키 극장에서 김기민을 보는 것. ㅋㅋ 아직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4. 새로운 모임의 시도 - 낮술 낭독회


독서모임 리더를 하고 있는 3인방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민음사 직원들처럼 낮술낭독회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정작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재밌을 거 같았다. 꽂히면 바로 실행을 해봐야 하는 스타일이라서.. 11월에 새로운 모임을 벌렸다. 마침 일도 여유가 있었기에 독서모임에 좀 더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두 번을 기획했지만 첫 모임은 1주일 정도 남겨놓고 모집을 시작했더니 인원이 모이지 않았고, 2주 정도 시간을 두었던 두번째 모임은 그래도 어찌저찌 모집이 되어서 소박하게 한 번 시작해보았다. (바로 어제!)


지정독서 모임만 아주 오랫동안 참여&진행을 해왔던지라 자유도서 모임은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와인과 간단한 먹거리도 준비하고, 서빙(?)도 해야 해서 서투른 부분도 많았을 거고 솔직히 잘 진행을 한 건지 스스로 복기가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약간 흐릿하다.. ㅋㅋ 자기객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객관화를 할 만한 데이터가 입력되지 않은 느낌.


사실 기대했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흘러가서 솔직히 이게 맞나? 싶은데 한 번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일단 몇 번 더 운영해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느낀 것이 있다면 모임의 분위기는 진행자도 물론 중요한데 참여자의 참여도와 참여자간의 케미스트리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

근데 이게 또 진짜 어려운 게 나도 오늘 첨 본 사람들인데 어떤 참여도와 케미가 나올지는 컨트롤이 불가능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일단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무언가 의지가 있다는 것이니 그걸 끌어내는 게 내 몫이 아닐까? 최대한 모두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으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온 사람들이 무언가 한 조각이라도 마음의 울림이 있는 시간을 얻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걸까, 할 수 있는 걸까. 그런 그릇이 되는 걸까.


원래 이런 생각은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없어지기 마련이라 생각하다 보면 ’나는 아닌가봐… 힝.. ‘ 이러다가, 또 천성적인 씩씩이 방어 모드가 자동 발동되어서 ’원래 자신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법이다! 생각보다 내가 괜찮을 수 있다! 스스로를 믿고 가야지‘ 한다. 이렇게 오락가락 하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아 모르겠다! 그만 둘 때 그만 두더라도 일단은 버티면서 뭐가 나오나 보자’ 로 퉁치는 패턴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그만하고 싶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요즘엔 모임이 그런 마음을 많이 유발하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또 다 일이 여유롭기 때문에 그런 거다. 바쁠 땐 고민이 없었다.  대신 그 땐 ‘내가 이 따위로 사는 게 맞냐’ 하는 불만은 있었다. 그 또한 괴롭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솔직히 불만 쪽이 덜하다. ㅋㅋ


일이 여유로우면 또 어떻게든 고민거리를 찾아내서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거 보면…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이 놈의 욕심이 문제다.


능력에 비해서 너무 많은 걸 욕심내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건가? 생각할 때도 있다.

원하는 걸 얻으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고, 거의 매번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들을 꼬박꼬박 얻었던 시간들이 쌓여왔기에, ‘노력하고, 마음을 쏟으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 라는 무의식 속의 공식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 거 같다.

그래서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또 그놈의 노력의 굴레에 나를 밀어넣고 있는데… 너무 지쳐버리지 않도록 밸런스를 잘 잡자, 너무 매몰되지는 말자고 글을 쓰면서 객관화를 해 본다.




어제 모임의 기억이 가장 생생한 기억일 뿐 아니라, 독서 모임을 앞으로 어떻게 굴려가야 할까의 고민은 하반기 내내 이어져 왔었기에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며 머리가 꽤 복잡했다. 그래서 회고글 쓰기 시작할 때 11월이 일은 여유로웠지만 정신적으로는 편치만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회고를 딱히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회고글을 적다 보니 최근의 이 고민들 속에 잊고 있었던 즐거운 이벤트들이 모두 11월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럴 수가! 엄청 옛날 일인 것 마냥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인간의 기억이란 이렇게 간사하다. 회고글 덕분에 11월에 느꼈던 긍정적인 기분들을 다시 꺼내 볼 수 있었다. 글을 시작할 때는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라 전혀 생각지도 못 했다. 이래서 귀찮아도, 매월 회고를 꼭 해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2024년 소비 회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