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아도 월간회고를 해야 하는 이유
벌써 11월 회고글을 적을 때가 되었다니.
일전에 회사 상사 분이 ‘하루 하루는 영원처럼 길고 고통스러운데, 한 달, 1년은 찰나 같다’ 라고 하셔서 정말 무릎을 탁 쳤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맞는 말이다.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렇다.
11월도 거의 다 가고 연말이다보니 어느새 올 한 해를 돌아볼 때쯤 되었는데, 느리게 추워지는 올해의 날씨 때문에 지금이 11월이라는 기분도 크게 느끼지 못 했다보니 더 갑작스레 연말을 맞이하는 느낌이다. 나의 마음은 여전히 거의 9-10월쯤인데 곧 12월이라니.
충격과 놀라움으로 시작해보는 11월 회고.
1. ’마이너스의 손‘
’마이너스의 손‘ 이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우리 회사에서는 이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늘 일은 많은데 일할 사람은 부족해서 허덕이다 보니, 일을 없애는(?) 사람이 환영 받는다.
11월은 기대도 안 했는데 나에게 ’마이너스의 손‘이 강림한 달이었다. 11월 전까지는 올해 온갖 일이 쏟아져서 너무 힘들었고, 소진되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뻗어 있던 시간(8월..)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 달에는 일이 나에게 오면 없어지더라.
11월 첫째주에 갑자기 2-3일 내로 해외 출장 갈 뻔 했는데, 상대측에서 일정 조율이 안 된다고 해서 안 가게 되어 얼마나 쾌재를 불렀던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통쾌하다. ㅋㅋ
하나 더 있다. 자료 준비할 것도 많고 손이 많이 가는 3자 회의도 이번달에 갑자기 주최할 뻔 했는데 (내 담당임..) 이 또한 상대측에서 못 온다고 하는 덕분에 무산되었다ㅋㅋ
없던 일도 생기면 내가 하고, 남의 일도 내가 하고, 누가 할 지 애매하면 당연히 내가 하는 시간들을 보내면서 버거웠던 순간들이 많은 한 해였는데, 11월은 그동안 고생했다고 주어진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ㅠㅠ 야근도 올해 들어서 가장 적게 한 것 같다.
2. 가을 나들이, 부모님과의 시간에 대한 생각
일이 여유로워서 11월 주말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11월 주말 중 하루는 큰 아빠의 횡성 전원주택에 가족들 다함께 놀러갔다. 서울을 벗어나니 확실히 여유롭고, 공기도 좋고, 당일치기였지만 배불리 먹고 여유롭게 잘 쉬고 온 하루였다. 10월은 다이어트를 한다고 양이 많이 줄었는데, 11월부터 야금야금 먹는 양이 늘기 시작해서 이 때 아주 정점을 찍었던 것 같다. ㅎㅎ
요즘에는 식사량을 조금은 조절하고 (다이어트 때만큼 줄이진 않지만) 운동도 다시 사부작 거리며 하고 있다. 그래도 한참 빠졌을 때보다는 뱃살이 조금 붙어서 몸이란 참 잔인하게도 정직하군 싶다. (움직이면 또 정직하게 빠지기도 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또 다른 주말 중 하루는 단풍놀이를 가보자며 뮤지엄산에 다녀왔다. 단풍철이 살짝 지나긴 했지만 날씨가 맑아서 좋았고, 미술관 공간도 예뻤다. 입장료가 꽤 비쌌는데, 연간권을 끊으면 3번만 가면 이득이라 호기롭게 연간권을 끊었다. 큰 아빠의 횡성 전원주택과는 30분 거리라서, 다음번에 횡성에 놀러갔다가 계절마다 또 들르자고 다짐했다. 그게 불과 지난주 일인데, 글을 쓰는 지금 그마저도 왜 이렇게 한참 옛날 일 같은지. 정말 하루하루는 영원 같은데, 한 달은 금방이다. 이 알 수 없는 시간 감각. 미스테리다.
주말에 쉬고 있어도 회사에서 연락이 올 때도 있고, 내가 굳이 집으로 싸들고 온 일이 있어서 ’저녁에 가서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에 주말에 놀면서도 맘이 편치 않은 적도 많았는데 (단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은 없는 건 안 비밀 ㅋㅋㅋ) 이 날은 모처럼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온전히 놀았던 날이다.
그리고 예전엔 정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엔 문득문득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모님과 건강하게 함께 시간 보낼 날들이 생각보다 얼마 안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분이 그렇다는 거고 여전히 많이 남았을 수도 있지만..) 돌아보면 부모님의 40대, 50대 시절이 정말 얼마 전 같은데 60대에 접어들어 이제 70대에 가까워지는 나이라니..
10년, 20년 뒤에 이번 달의 이 시간들을 마치 어제 같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별것 아니라고 느끼는 시간들이 나중에 되돌아보면 오래 가는 기억이 되는 것 같다.
사실 이번달 2주 연속 부모님과 주말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꽤나 버겁다고 느끼고 이번주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푹 쉬어야겠다 생각했는데, 회고글을 적다 보니까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잊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 이래서 돌아보기가 중요한 것 같다.
앞으로만 내달리지 말고, 멈춰서서 돌아보는 시간도 빼놓지 말아야겠다.
3. 아이돌 덕질도 안 해 봤는데 발레 덕질을 하네 - 새벽 6시반에 예당 줄 서 본 썰
천성이 게으르고 집요하지 못 해서 덕질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누군가를 흠모하는 것보다 나한테 관심이 더 큰 철저한 개인주의자라서 학창 시절에 한 번쯤 거쳐가는 아이돌 덕질도 안 해봤다. 좋아하는 가수는 있었지만 소식을 다 팔로업하고 굿즈를 사고 콘서트를 가고 할 정도로 걍 그렇게까지 관심이 안 가….
그런 내가 인생 처음으로 공연 티켓을 구하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봤네.. ㅋㅋ
국립발레단에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박세은과 마린스키 발레단의 김기민을, 최애작 라 바야데르 주연으로 섭외해왔는데 이 조합 어떻게 안 봐….
지난달에 매진 공연의 취소표를 3번이나 줍줍해봤기에 이번에도 호기롭게 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와 …. 이 공연은 진짜 쉽지 않았다. 수시로 예매 사이트에 들락날락도 해보고 무한 새로고침 노가다도 해봤지만 티켓 확보에 실패해서 ‘아 이제 나의 운이 다한 것인가. 이번은 정말 안 되는건가?’ 했는데 우연히 공연 당일에 현장에서 시야제한석을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생 다시 없을 공연일 수도 있는데 밤 새는 것도 아니고 몇시간 줄 서는 것 쯤이야.. 무조건 가야지…
티켓 판매가 선착순이기 때문에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했다. 몇시쯤 가야 하나 눈치를 보다가, 2시 공연이니까 최소 7시 전에는 가야 할 것 같다는 감에.. 6시 동도 안 튼 새벽에 택시를 불러 잡고 예당에 가서 아직 열지 도 않은 문 앞에서 6:40분부터 줄을 섰다.ㅋㅋㅋㅋ 그 때 갔는데도 내 앞에 이미 20명 넘게 서 있었다는 거. 역시 사람들은 대단해..
나중에 번호표를 나눠준 걸 받고 보니 29번이었다. 시야제한석이 162석이라고 하고, 1인당 티켓 구매가 4장까지 가능해서 완전 안정권이었다. ㅎㅎ 일찍 일어나는 새는 벌레를 잡을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해서 본 공연이 좋았냐고?
헤헷 말해 뭐해..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 기대했던 만큼 ‘미쳤다, 찢었다!!!’ 막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박세은과 김기민은 당연히 너무너무너무 훌륭했는데, 이제는 너무나 슈스가 되어버린 두 월드스타를 담기에는…. 예당이 너무 작았다 ㅠㅠㅠㅠ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못 가봤지만 마린스키 극장은 가봤기에..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도 가봤기에.. 이들의 퍼포먼스가 그 곳에서였다면 얼마나 더 빛났을지가 이미 그려지기 때문에 약간 아쉬움은 남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공연의 여운이 진짜 오래 갔다. 끝나고 나서도 좋은 공연은 흔치 않은데 이 공연은 그랬다.
어쩌면 이 둘의 조합을 보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둘이 현역 무용수로 언제까지 공연을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둘이 같이 한국에 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내가 그 때 한국에 있을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새벽부터 줄을 서도 그 시간과 체력이 1도 아깝지 않았다. 시야제한석 치고 자리도 꽤나 좋아서 (내가 꽤 앞번호였기에 가능했겠지! 자리 선택도 선착순이었다. ㅎㅎ 좋은 자리부터 빠짐..) 객석에 앉자마자 ‘헐…나 너무 잘 했쨔나!!’ 하면서 셀프 극찬을 했더랬다 ㅎㅎㅎ 자기애 샘솟음 ㅎㅎㅎ
공연 보고 나니까 ’아 이걸 봤으니 난 이제 여한이 없다. 내일부터 어떤 빡치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괜찮다. 나는 김기민과 박세은의 라바야데르를 본 사람이니까 ㅎㅎㅎㅎ‘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잡은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도 많이 더해진 효과일 것이다. 실제로 이 뽕이 3일 이상 갔던 것 같다. 1주일 정도 되니까 흐려지긴 했는데, 회고글 쓰면서 다시 떠올리니 역시나 또 행복하다.
다음의 목표는, 김기민이 은퇴하기 전에 마린스키 극장에서 김기민을 보는 것. ㅋㅋ 아직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4. 새로운 모임의 시도 - 낮술 낭독회
독서모임 리더를 하고 있는 3인방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민음사 직원들처럼 낮술낭독회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정작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재밌을 거 같았다. 꽂히면 바로 실행을 해봐야 하는 스타일이라서.. 11월에 새로운 모임을 벌렸다. 마침 일도 여유가 있었기에 독서모임에 좀 더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두 번을 기획했지만 첫 모임은 1주일 정도 남겨놓고 모집을 시작했더니 인원이 모이지 않았고, 2주 정도 시간을 두었던 두번째 모임은 그래도 어찌저찌 모집이 되어서 소박하게 한 번 시작해보았다. (바로 어제!)
지정독서 모임만 아주 오랫동안 참여&진행을 해왔던지라 자유도서 모임은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와인과 간단한 먹거리도 준비하고, 서빙(?)도 해야 해서 서투른 부분도 많았을 거고 솔직히 잘 진행을 한 건지 스스로 복기가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약간 흐릿하다.. ㅋㅋ 자기객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객관화를 할 만한 데이터가 입력되지 않은 느낌.
사실 기대했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흘러가서 솔직히 이게 맞나? 싶은데 한 번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일단 몇 번 더 운영해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느낀 것이 있다면 모임의 분위기는 진행자도 물론 중요한데 참여자의 참여도와 참여자간의 케미스트리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
근데 이게 또 진짜 어려운 게 나도 오늘 첨 본 사람들인데 어떤 참여도와 케미가 나올지는 컨트롤이 불가능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일단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무언가 의지가 있다는 것이니 그걸 끌어내는 게 내 몫이 아닐까? 최대한 모두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으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온 사람들이 무언가 한 조각이라도 마음의 울림이 있는 시간을 얻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걸까, 할 수 있는 걸까. 그런 그릇이 되는 걸까.
원래 이런 생각은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없어지기 마련이라 생각하다 보면 ’나는 아닌가봐… 힝.. ‘ 이러다가, 또 천성적인 씩씩이 방어 모드가 자동 발동되어서 ’원래 자신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법이다! 생각보다 내가 괜찮을 수 있다! 스스로를 믿고 가야지‘ 한다. 이렇게 오락가락 하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아 모르겠다! 그만 둘 때 그만 두더라도 일단은 버티면서 뭐가 나오나 보자’ 로 퉁치는 패턴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그만하고 싶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요즘엔 모임이 그런 마음을 많이 유발하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또 다 일이 여유롭기 때문에 그런 거다. 바쁠 땐 고민이 없었다. 대신 그 땐 ‘내가 이 따위로 사는 게 맞냐’ 하는 불만은 있었다. 그 또한 괴롭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솔직히 불만 쪽이 덜하다. ㅋㅋ
일이 여유로우면 또 어떻게든 고민거리를 찾아내서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거 보면…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이 놈의 욕심이 문제다.
능력에 비해서 너무 많은 걸 욕심내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건가? 생각할 때도 있다.
원하는 걸 얻으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고, 거의 매번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들을 꼬박꼬박 얻었던 시간들이 쌓여왔기에, ‘노력하고, 마음을 쏟으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 라는 무의식 속의 공식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 거 같다.
그래서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또 그놈의 노력의 굴레에 나를 밀어넣고 있는데… 너무 지쳐버리지 않도록 밸런스를 잘 잡자, 너무 매몰되지는 말자고 글을 쓰면서 객관화를 해 본다.
어제 모임의 기억이 가장 생생한 기억일 뿐 아니라, 독서 모임을 앞으로 어떻게 굴려가야 할까의 고민은 하반기 내내 이어져 왔었기에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며 머리가 꽤 복잡했다. 그래서 회고글 쓰기 시작할 때 11월이 일은 여유로웠지만 정신적으로는 편치만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회고를 딱히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회고글을 적다 보니 최근의 이 고민들 속에 잊고 있었던 즐거운 이벤트들이 모두 11월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럴 수가! 엄청 옛날 일인 것 마냥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인간의 기억이란 이렇게 간사하다. 회고글 덕분에 11월에 느꼈던 긍정적인 기분들을 다시 꺼내 볼 수 있었다. 글을 시작할 때는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라 전혀 생각지도 못 했다. 이래서 귀찮아도, 매월 회고를 꼭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