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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Sep 22. 2020

혼자 다해버리는 게 기회를 뺏는 것일지도

라면 끓이는 동생을 만류하다가

집에서 함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건 동생이다. 둘 다 라면을 좋아해서 함께일 때면 항상 라면을 먹는다. 내가 라면을 끓이고 설거지까지 하는 게 익숙해졌다.


어느 날은 동생이 라면을 끓이겠다고 했다. 모든 동작이 느리고 답답해서 차라리 내가 해버리는 게 낫겠다 싶은 순간이 많았다. 결국 중간에 내가 동생에게 비키라고 라면을 끓인다. 맛있게 먹고 설거지를 할 동안 동생은 평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이었던 식탁 닦기를 한다.


어느 날 동생과 이야기를 하는데 동생이 혼자 있을 때 삼십 분 가까이 걸려서 라면을 끓였다고 했다. 나는 라면 끓을 때의 요령 등에 대해 잔소리하듯 말한다. 동생은  내 말이 끝나고 말한다. 맨날 네가 끓이니까 그러지.


나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기회를 뺏는 거였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팀플을 할 때도 인턴을 할 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내가 하면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 사람이 경험할 기회를 빼앗아가는 거일 수도 있다고.


축구를 보다 보면 잘하는 국가대표선수가 후배들을 위해 은퇴한다고 할 때가 있다. 승리의 부적 같은 선수가 그런 말을 하면, 팀이 승리하면 되는 거고 그것에 기여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싶을 때가 있었다. 조직생활 경험이 늘어날수록 더 느낀다. 내가 배려라는 이름으로 혼자 모든 걸 다 해버리는 게, 누군가의 가능성을 발견할 기회를 없애버리는 일이라는 걸.


내가 욕심낼 분야와 양보할 분야를 구별할 만큼의 현명함은 아직 얻지 못했다. 여전히 앞장서서 걷는 게 편하지만, 서툴지만 천천히 걷고 있는 누군가를 묵묵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걸 느낀다. 내게 익숙하고 당연한 길이 누군가에게는 이제 막 진입한 낯선 길일지도 모르니까. 나도 처음에는 낯설었으니까.


동생이 라면을 끓인다. 노래가 몇 곡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지만, 완성된 라면은 맛있다. 맛보지 못했으면 후회했을 라면이다. 동생의 라면이 시작되는 걸 목격하는 게, 라면의 맛만큼이나 흥미롭다.



*커버 이미지 :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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