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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 day 1 scene

실험영화를 찍으려면 실험적으로 살아야 하나

실험영화 강의를 듣다

by 김승

*몇 년 전 기록해둔 글. 기억이 희미하다.



퇴근 후에 경복궁역에서 평창동 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이전 회사동료들과 만나는 날에 모임을 주도하는 A가 자신의 유년기를 보낸 곳이라며 소금구이부터 노가리까지 많은 음식들을 소개시켜줘서 저녁에 세 시간 동안 음식점 다섯곳을 가기도 했다. 평창쪽에서 사는 친구 B가 데려가 준 어려운 이름의 술이 가득한 바도 기억난다. 간판들을 보면 그곳이 파는 게 떠오르다가 사이사이로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이 동네는 당신들이 유명하군요. 안부인사로 카톡을 보낼 정도의 거리인지도 확신못할 만큼 멀어진 이들. 교복 입은 학생부터 시장에서 떼어온 물건을 들고 탄 아저씨까지 사람가득한 버스가 평창 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간다.


평창은 늘 살고 싶은 동네 중 하나다. 해외여행을 시작하고 기회기 생기면 해외를 외치던 내가, 우연히 갔던 경복궁은 예상 못한 큰 감흥을 느끼게 해줬다. 청와대 덕분에 걱정 없는 치안, 늘 뒤에 있어주는 인왕산까지 든든함이 느껴진다. 집값을 알아보지 않아서 속 편히 하는 소리겠지만.


내린 버스정류장은 수업 전에 요기를 할 빵을 살 편의점 찾기도 힘들어서 십분 정도 걸어서 근처 작은 마트에서 빵과 물과 샀다. 계산하면서 마트적립카드가 있냐고 묻는다. 이곳에서 생필품을 사며 포인트를 쌓는 삶을 상상해본다.


도착한 공간은 위에는 수학학원이 있고 밑에 영화공간이 있었다. 수학학원을 다니는 아이 중 이곳에서 영화를 배울 생각을 할 수 있는 아이는 몇일까. 영화를 전공하고 수학학원에서 강사로 일한다는 지인이 떠올랐다. 아주 흔한 경우지만.


수업에 모인 이들의 의상에는 개성이 크게 묻어났다. 영화나 옷이나 취향을 드러낸다는 면에서는 통한다.


수업에서 실험영화의 배경, 종류와 래퍼런스를 본다. 사람들이 필기를 시작한다. 필기는 오랜만이다. 유인물 뒤에 나도 괜시리 급하게 필기를 해본다. 업무회의 때는 내가 정리할 부분을 중점으로 적는데, 처음 듣는 내용이라 판단이 쉽지 않아서 무작정 모두 적어낸다.


16mm필름을 만져본 건 처음이다. 수강생들에게 할당된 필름 위를 각자 꾸민다. 핀셋으로 긁거나 메니큐어를 칠하고 싸인펜으로 글씨를 쓴다. 필름의 까끌한 면 위에 무엇인가 그려내니 척박한 땅위에 희망을 가지고 씨를 뿌리는 느낌이다. 부디 상영 때 내가 심은 무엇인가 피어나기를 바라며.


작업이 끝난 수강생들의 필름을 이어붙인다. 필름에 파인 홈의 양끝을 이어서 테이프를 붙인다. 도구도 과정도 처음이다. 처음의 설렘보다 익숙해진 뒤 권태를 먼저 떠올린다. 오전의 업무나 평창의 친구들처럼.


필름이 상영된다. 프레임 단위도 잘 몰라서 내 필름이 처음이 아니었다면 내가 작업한지도 몰랐을거다. 필름 위에 '나'라는 글자를 자음과 모음을 나누거나 길게 흘려쓰는 등 필름 가득 새겼는데 티가 나진 않는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나'가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정릉역에 신설우이선이 생긴 덕에 빠르게 갔다. 신설우이선은 처음이다. 오늘은 처음인 게 많다. 이제 처음일 수 없는 게 늘어났다. 다음주 실험영화 수업의 감흥은 오늘 같을 수 없을거다. 모든 처음들이 끝나가는 밤이다. 난 오늘 처음에 대한 실험을 했다.



*커버 이미지 : 살바도르 달리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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