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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가게 알바생, 내가 아는 최고의 큐레이터

생애 첫 큐레이터는 비디오 가게 알바생이었다

by 김승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거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정문 앞 비디오 가게에서 만화영화를 빌려보는 게 당시의 내겐 주요 이벤트였다. 엄마가 허락해주는 건 일주일에 한 편 정도였고, 그 한 편을 고르기 위해 비디오 가게에 틈날 때마다 가서 제목을 살펴봤다.


"이거 재밌는데 볼래?"


당시 비디오 가게 알바생은 짧은 시간에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들은 고통적으로 늘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만화영화를 고르는 내게 거침없이 추천을 해줬고, 대부분 그 추천은 탁월했다. 직접 보고 추천해주는 것만큼 좋은 추천은 없을 테니까. 그들은 자라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만화영화를 본 걸까 싶을 만큼 어느새 그들의 추천을 신뢰하는 나를 발견했다. 만약 당시 내가 나이가 좀 더 많았다면, 만화영화뿐만 아니라 좋은 영화도 좀 더 빨리 접하지 않았을까.


'펄프픽션', '킬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등으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감독 데뷔도 전인 비디오 가게 알바생 때부터 유명한 걸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 추천받은 영화는 믿을 수 있으니까. 쿠엔틴 타란티노는 가리는 것도 없이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는 영화광이었고, 본 영화 수만큼이나 추천해줄 수 있는 영화의 범위도 넓었을 거다.


안목을 가진 큐레이터의 위상이 점점 커지는 요즘, 비디오 가게 알바생이 자꾸 떠오른다. 그들은 내가 처음으로 만난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어떤 가이드라인도 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천을 해주는 사람들. 지금처럼 영화 관련 정보도 많지 않아서 오로지 자신의 감상으로 추천해주는 사람들.


이젠 비디오도 사라지고 스트리밍 서비스로 영화를 보고 있다. 넷플릭스와 왓챠는 수시로 내 취향이라며 영화를 알고리즘을 통해 추천해주고 있다. 내가 영화를 고른다는 느낌보다, 플랫폼이 내가 볼 영화를 지정해준다고 느낄 때도 있다. 비디오가 활성화되었던 시대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걸 비디오 가게에서 추천받아서 봤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알고리즘 추천으로 선택해서 본 영화와 비디오 가게 알바생의 권유로 본 영화는 분명 같은 영화임에도 다른 결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비디오 가게가 다시 생길 일은 아마 없을 거다. LP가 최근 들어서 다시 인기라는데, 비디오에게 그런 일이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주변에서 영화 추천해달라는 사람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내가 비디오 가게 알바생이 되는 상상을 한다. 비디오 가게 사장은 뭔가 부담스러우므로, 알바생이라는 포지션이 편할 거다. 반납하면서 영화 후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할 거다.


집에서 꾸준히 영화를 보지만 굳이 리뷰를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는 비디오 가게 알바생의 마음으로 브런치에 기록을 남길 예정이다. 마치 어제 본 비디오의 후기를 말하는 비디오 가게 손님의 마음으로, 어제 본 비디오의 벅참을 참지 못해 손님에게 권하고 마는 알바생의 마음으로 말이다.


비디오가 사라진 시대에, 비디오 가게 알바생의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권하고 싶다.



*커버 이미지 : 영화 '소나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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