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 day 1 scene

시간만 때워도 결과가 있다면

도둑놈 심보로 멍 때리며 시간 보내기

by 김승

26살에 군대를 갔다.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간만큼 주변에서 걱정도 많이 했지만,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했다. 물론 군대라는 집단의 특성상 좋을 수는 없지만, '전역'이라는 목표는 그저 시간만 흘리면 되는 것이기에 편했다. 게임으로 치면 퀘스트 완료 조건이 '시간만 흐르면 됨'이었기에, 딱히 걱정이 없었다. 군대에 오기 전에 고민이 많았던 건 주도적으로 뭔가 하는 게 쉽지 않아서였는데, 군대는 시키는 것만 해도 시간이 지나므로 무척이나 편했다.


그러나 군대의 시간은 끝이 났고 이제는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에서도 위에서 시키는 일이 있고, 내가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적절히 균형을 맞추면서 직장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군대와 달리 직장에서는 시간만 보내서는 안 된다. '성과'라는 걸 내야만 한다. 성과를 위해서 시간을 잘 활용해야만 한다. 야근을 안 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하고, 집중해도 잘 풀리지 않는 일도 존재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위에서 보기에는 나의 퍼포먼스가 별로일 수도 있다. 직장에서는 시간이 아니라 결과가 모든 걸 증명한다.


글을 쓸 때마다 쓰는 시간마다 망상을 하는 시간이 더 길다. 애초에 이 글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쓰게 되었다. 하루에 두 시간 글을 쓴다고 말했을 때, 막상 집중해서 쓴 시간은 얼마나 될까. 두 시간 동안 워드 화면을 본다고 글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두 시간 뒤에 머리로 한 생각이 자동으로 정리되어서 워드 파일로 완성되면 좋겠으나, 그런 일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렸을 적에는 성장에 눈에 띄게 크다 보니 매일매일 크는 게 느껴졌다. 그저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잠만 잘 자도 성장하는 걸 느꼈다. 30대가 된 지금은 성장은커녕 후퇴만 안 되어도 안도하는 나날이다.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진다. 식단 관리부터 운동까지 관리 없이 시간과 보내다 보면 몸이 점점 나빠질 거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던 어린 시절에는 시간만 보내도 20대, 30대에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도둑놈 심보로 상상해본다. 멍하니 시간만 때워도 결과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멍하니 시간을 때우면서 목격할 수 있는 건 내가 늙어간다는 현실뿐이다. 오늘도 글 쓰기 귀찮아서 멍하게 있다가, 뭐라도 써야 하므로 멍하게 있어도 결과물이 뚝딱 나오는 상상을 써본다.


멍하게 시간만 때웠을 뿐인데, 내일이 찾아온다.



*커버 이미지 :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고집'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늘은 나에게 잘했다 말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