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 day 1 scene

나의 장례식

장례식 상상하기

by 김승

유서 쓰기


중학생 때였을까, 유서를 써본 적이 있다. 죽음을 예감해서는 아니고, 수업 시간에 수행평가 과제처럼 이뤄졌다. 당시에는 죽음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유서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하며 작성했던 기억이 난다. 칭찬받을 만한 유서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발상이다. 진짜 유서라면, 그걸 누가 평가할 수 있겠는가.


막상 지금 내게 다시 유서를 쓰라고 한다면 구글에 '유서 쓰기'를 검색할 것 같다. 가진 게 없어서 남길 것도 없다. 지금 당장 죽는다면 남은 학자금 대출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아직 당근 마켓으로 팔지 못한 신디사이저는 버려지게 될까. 늘 복수심에 불타 있지만, 막상 죽기 전에 쓰는 문서에 미워하는 사람들 이름을 남기는 건 마지막에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타인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억울해서라도 남 때문에는 못 죽는다. 보란 듯이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라는 걸 몸으로 배웠으니까.


결국 내가 지금 유서를 쓴다고 해봐야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일 텐데, 그걸 읽는 사람이라고는 가족들 뿐이지 않을까. 100살까지 사는 게 꿈인 내가 별생각 없이 유서를 쓰고, 유서를 집에 방치해두고 나갔다가 가족들이 본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거다. 가족의 유서를 보는 순간 온갖 감정이 뒤섞이지 않을까. 나의 죽음을 상상하는 건 가볍고 흔한 일이지만, 가족의 죽음을 상상하고 싶진 않다.



장례식 풍경


여태까지 간 장례식이 몇 번인지 잘 기억이 안 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 장례식은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이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지만, 정작 열세 살이었던 당시에는 눈물이 안 났다. 그저 우는 어머니를 신기하게 바라만 봤다. 눈물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났다. 내가 아는 가장 지혜로운 외할아버지가 세상에 사라졌다는 걸, 삶이 힘들어지고 나서야 실감했다. 이기적으로, 내가 힘든 순간에 의지하고 싶은 존재를 떠올린다.


그 이후로 이름 모를 친척의 장례식에 어머니를 쫓아서 간 적은 있지만, 연이 닿은 사람의 장례식은 한번 참석했다. 친한 누나의 장례식이었고, 여전히 실감이 안 난다. 내가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장례식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장례식에 사람이 많이 찾아와야 잘 산 인생이라는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장례식으로 평가받기에는, 누나는 너무 어렸다. 누나와 별로 안 친한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는데,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울지 못한다.


내게 장례식장은 늘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들이 모인 공간. 눈물이 넘쳐나지만, 눈물이 친분의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다. 마음으로 우는 걸 알아차릴 만한 기술이 내겐 없다. 주변 친구들의 부모님 장례식에 갈 때마다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내가 느끼지 못한 감정을 아는 척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마음이 아플 거라는 것만 짐작할 뿐, 그 크기를 알 수 없어서 함부로 어떤 표정을 짓지 못한 채 침묵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례식장은 산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죽은 자에 대한 평가가 이어진다. 술까지 한잔 하고 죽은 이를 함부로 평가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장례식은 산 사람에 의해서 이뤄진다. 죽은 자가 어떤 걸 원했어도, 최종 결정은 산 자에 의해 이뤄진다. 산 자가 죽은 자의 마음을 헤아려서 임의로 무엇인가 결정하는 순간도 많다. 그걸 지켜보는 죽은 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그래서 가끔 꿈에 나타나기도 하는 걸까.



나의 장례식


내가 죽으면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 부모님은 나에 대해 잘 모른다. 부모님은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내 자식은 어떤 사람일 거야, 믿고 싶은 대로 나에 대해 이야기하실 거다. 부모님에게 진짜 나를 보여준 적이 있나. 똥오줌도 못 가리던 시절 말고는 과연 내가 진심이었던 적이 있나. 부모님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나날의 연속이었음에도, 가끔은 나의 능력을 과장해서 말하곤 했다. 나 또한 부모님의 진심은 모른다. 부모님의 기대를 추측해볼 뿐이다. 부모님과 나는 서로를 추측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왔다.


진짜 나를 아는 건, 동생뿐이다. 일기장조차도 미래의 나를 의식해서 솔직하게 못 쓰는 내가, 동생 앞에서는 솔직하다. 내가 인지도 못한 채 동생에게 준 상처도 많을 거고, 나쁜 영향도 많이 주었을 거다.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한 채 안 좋은 내 모습을 보여준다. 동생아, 너 말고는 진짜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이 없다. 네가 사라지면, 진짜 내가 사라지는 것일지도 몰라. 제일 친한 친구가 동생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건, 진짜 내 모습을 동생에게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까.


'진짜 나를 알고 싶다면 동생에게 물어봐.'


유서에도, 장례식장에도 남길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일 것 같다. 진짜 나를 아는 건 동생뿐일 테니까. 그런데 이러면 동생이 부담스러울 텐데. 아니, 부담을 가질 만큼 사람들이 많이 오긴 할까. 동생은 나를 배려한답시고 말을 가려서 할까. 진짜 나는 너무 쓰레기 같은 존재라서 노골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동생은 사실 이런 내가 너무 밉지 않았을까. 동생의 진짜 얼굴을 아는 것도 나뿐일까. 내가 사라지는 게 너에겐 무슨 의미니. 오그라드는 질문이므로 하지 않기로 한다.


죽을 때가 되어도 얼마나 궁금할 게 많을까. 눕는 순간까지 물음표의 연속일 것 같다. 죽어서도 나의 장례식 풍경이 궁금할 것 같다.



*커버 이미지 : 에릭 베렌스키올드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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