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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Sep 10. 2020

일상에서 여행을 지우려다가 그리워하는

강제로 치유 중인 여행병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매해 여행을 갔다. 주로 명절 연휴를 이용해서 집에서 탈출할 겸 겸사겸사 여행을 갔고, 주로 갔던 건 유럽이다. 도장깨기 하듯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기분이 좋았다. 


2020년에도 당연히 유럽 여행이 내 삶에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코로나가 찾아왔다. 유럽뿐만 아니라 국내 여행도 힘든, 외출 자체가 힘든 시기가 되었다. 매해 여행을 가는 게 그 해의 거의 유일한 이벤트였고, 명절을 탈출하는 좋은 구실이었으나 올해는 힘들어졌다. 


실제로 여행지에서 보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하나의 여행마다 준비하고 기대하는 기간을 따지면 생각보다 여행이 내 삶에서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음을 느낀다. 생활에서도 그 흔적을 느낄 때가 있다.



항공사 마일리지


작년 말에는 그동안 주력으로 모아둔 항공사의 마일리지가 만료되는 걸 막으려고, 해외 신문을 구독했다. 구독하면서 마일리지가 조금 추가되는데, 마일리지가 조금이라도 추가되면 마일리지의 유효기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꽤 쌓인 마일리지를 올해에는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젠 유효기간이 만료되면 만료되는 대로 그냥 둬야 할 것 같다. 몇 년 뒤가 될지 모르는 여행을 위해 마일리지를 매해 구입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많지 않은 비용이어도 그 돈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냈다. 마일리지 숫자가 여행을 다녔다는 하나의 증거 같아서 보기만 해도 괜히 기분이 좋았는데, 이젠 내 삶을 스쳐 지나가는 숫자로 생각하려고 한다.



캐리어


올해 초까지만 해도 캐리어를 하나 더 사야 하나 고민했다. 몇 년간 보라색 기내용 캐리어와 함께 했다. 첫 여행이었던 프랑스 파리부터 마지막 여행이었던 체코 프라하까지 늘 옆에 있어줬고, 여태껏 말썽 한번 없었다. 마침 끌고 다니던 캐리어의 브랜드에서 할인을 하기에 하나 더 살까 했는데, 만약에 샀다면 좁은 집에 공간이 더 줄지 않았을까. 


이미 잘 쓰고 있는 캐리어를 굳이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망가지지 않는다면 첫 캐리어와 계속 함께 해도 좋지 않을까.



여행 관련 앱


여행 관련해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두 앱은 '스카이스캐너'와 '부킹닷컴'이다. 스카이스캐너로 항공권을 찾고, 부킹닷컴으로 숙소를 찾는 루틴은 첫 여행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다. 인스타그램 접속하듯이 틈 날 때마다 두 앱을 실행하고 이곳저곳을 검색해본다. 추석 연휴에 어딜 가야 저렴할지, 가고자 하는 곳에 괜찮은 숙소가 있는지 본다.


이제는 검색하는 게 일종의 희망고문처럼 느껴진다. 결국 핸드폰 첫 화면에 위치한 두 앱을 지웠다. 여행 때마다 요긴하게 썼던 트리플, 트립어드바이저 같은 앱도 함께 지웠다. 그나마 가끔 사용하는 건 구글 지도다. 모르는 도시 이름 등을 들으면 한 번씩 들어가서 여행 당시 저장했던 장소들을 본다. 저장해둔 곳들은 지금쯤 많이 변했을까. 


사진


아무리 여행을 다녀도 감춰지지 않는 서툰 이방인의 모습이 사진만 봐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셀카를 찍지 않아서 내 사진은 거의 없고 여행지의 풍경들이 남아있다. 구도까지 똑같은데 굳이 여러 번 찍은 사진들도 있다. 보정 앱으로 찍은 사진도 있고, 기본 카메라 앱으로 찍은 사진도 있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이가 찍어준 나의 뒷모습도 있고, 그래도 여행 중에 한번 찍어야 되지 않겠냐면서 못 이기는 척 찍은 내 모습도 있다. 


막상 여행 중에는 눈에 담기 바빠서 인스타그램에도 사진을 못 올릴 때가 많다. 오히려 돌아오고 나서 지난 여행을 회상하며 사진을 올린다. 뒤늦게 올린 여행지 사진들로 가득한 인스타그램을 보면, 여행을 다니는 중인 것만 같다. 여행하는 기간보다 여행을 그리워하는 기간이 훨씬 길다는 걸 깨닫는다. 사진을 보며 흩어진 여행의 기억들을 다시 붙이는 작업을 한다. 



여행일기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일기를 여행만 가면 열심히 쓴다. 여행을 가면 도시를 자주 바꾸는 편이라 도시 간 이동하는 중에 주로 일기를 쓴다. 자기 전에 쓰려고 해도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 기절하는 날이 많다. 그런 날에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모든 기억을 총동원해서 몰아서 일기를 쓰기도 한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사진을 보면서도 내가 찍은 이 곳이 어디인지 헷갈린다. 도시들끼리도 큰 특징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점이 많다 보니, 사진을 섞어두면 도시끼리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여행을 다녀온 날짜조차도 헷갈린다. 원활한 추억 관리를 하기 위해 여행일기를 쓴다.


xx년 xx월

다음 여행지


다음 여행일기는 언제쯤 적게 될까. 일상에서 여행을 지우려고 이것저것 들춰보다가, 여행을 더 그리워하게 됐다.




*커버 이미지 : 독일 하이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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