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글의 시작은 일기일지도
일기는 왜 쓰는가
현대문학의 정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작정하고 처음으로 읽은 작가는 '김영하'다. 고등학교 때 문학반 동아리를 했는데, 당시 문학반 선생님께서 선물해주신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가 내가 처음으로 읽은 현대소설이다. 교과서에 있는 문학과는 결이 달랐고, 이렇게 선정적인 작품이 상도 많이 받는다는 게 신기했다.
카카오tv의 콘텐츠 '톡이나 할까'에 김영하 작가가 나와서 봤다. 김영하 작가와 관련된 콘텐츠는 챙겨보게 된다. 역시나 달변가라고 느꼈다. 김영하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삶의 무의미와 싸우기 위해서 일기를 쓰는 거라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문장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일기를 쓰는 작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말이었다. 쓰는 순간 의미가 발생하고,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무의미해 보이는 하루에 의미가 생기니까.
올해 초에 민음사 북클럽을 구독하면서 '릿터'와 '한편'도 구독했다. 고백하자면 구독 이후로 쌓아만 두고 안 읽다가 이번에 도착한 릿터를 처음으로 읽었다. 하필이면 이번 릿터 주제가 에세이였기 때문이다.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비교적 앞쪽에 있는 문보영 시인의 글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글을 쓸 때 일기라고 생각하면 쓰기 편한데, 일기가 아닌 다른 종류의 글이라고 생각하면 쓰기가 어려워진다는 내용이었다. 일기는 자신을 독자로 정하고 쓰는 글이기에, 공개적으로 쓰는 글보다 부담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를 안 쓴다.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무의미의 기준은 생산성이었을까. 몇 년 동안 쓴 일기를 내가 다시 안 본다는 것과 대부분 동어반복인 내용이라는 생각에 일기를 안 쓰게 되었다. 무엇이든 '쓴다'는 게 의미가 될 텐데, 좀 더 성대한 의미를 바란 걸까.
여행지에서는 기록용으로 열심히 일기를 쓰지만, 일상에서는 잘 안 쓴다. 여행은 그 자체로 특별하게 쓰기고, 일상은 악착같이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면 특별하지 않다고 여겨서 일까. 일상에서 의미를 부여하는데 집중하기보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건강하려나.
그래서 요즘은 브런치에 일기 쓰듯이 매일 조금씩이라도 무엇인가 쓰고 있다. 일기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각 잡고 쓰는 게 아니라, 혼자 보는 일기처럼 퇴고도 안 하고 비문이 쉽게 발견되는 글을 발행한다. 가끔 공감해주는 이들의 반응이 오기도 한다. 내가 일기를 안 쓴 건 반응이 없어서일까. 언제 어디서나 관심받고 싶은 관종인 게 문제였을까.
일기를 통해 내 지루한 일상을 다시 쳐다보는 게 별로라고 생각했다. 지금 일기를 다시 써도 별 차이는 없을 거다. 일상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모든 글의 시작이므로, 일기는 아이디어 수집의 좋은 계기이긴 하다. 내가 브런치에 쓰는 글 대부분은 평소에 메모해둔 글에서 시작되니까. 일기를 썼다면, 일기에 적었을 만한 내용들.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만 글을 쓰고, 그러한 글은 일기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으니 내가 쓰는 글은 대부분 일기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일기는 일상에 빚을 지고, 나는 일기에 빚을 져서 글을 쓴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며 꽤 괜찮은 협업을 이어나간다. 오랜만에 심심한 일기를 쓰고 자야겠다.
*커버 이미지 : 앨머 테디마 '더 이상은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