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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Oct 16. 2020

기묘한 첫 부산여행

갑작스럽고 무계획해서 인상적이었던 여행

나는 부산에 가 본 적이 있다. 어렸을 적에 토목 일하는 아버지가 부산에 계셨던 적이 있어서 부산에 잠시 가있던 적도 있었다는데, 부모님만 알 뿐 내 기억 속에는 없다. 성인이 되고 부산에 간 건 딱 한 번인데, 나는 지금도 그때의 여행이 참으로 묘하게 기억된다.


1. 밤새고 간 여행


학과 내에 있는 희곡분과에서 연극을 해서 참여한 뒤에 밤새 뒤풀이를 하고 바로 여행을 갔다. 첫 차를 타고 집에 가서 양말이랑 칫솔만 챙겼던 것 같다. 덕분에 여행을 간다는 설렘 대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비몽사몽 하다 보니 어느새 버스 안이었다.


2. 영화과 버스를 타고


문창과가 속한 단과대는 예술대학이었고, 같은 예술대에 소속된 영화과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애초에 영화과에서 부산국제영화제에 맞춰서 간 여행인데, 타과생인 나도 같이 가게 된 거다. 모르는 사람으로 가득한 버스에 어색하게 탔다. 아니, 졸려서 뵈는 것도 없이 탔다. 


3. 지금은 연락도 안 하는 친구들과 함께


당시 나를 포함해서 같은 과 동기 네 명이서 함께 여행을 갔다. 아이러니한 건 이들과 지금 자주 보지 않는다는 거다. 한 명은 아예 연락처도 모르고, 한 명은 안 본 지 몇 년이고, 그나마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당시 어떻게 그런 조합이 모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니, 나는 이 조합에 어떻게 끼게 된 거지? 확실한 건 이렇게 네 사람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일 확률도 0에 가깝고, 넷이 다시 여행을 갈 일은 단언컨대 없을 거라는 거다. 


4. 모르는 이들과 숙소를


영화과에서 버스와 여관을 잡아줬고, 굉장히 저렴한 가격에 이용했던 게 기억난다. 방에는 5~6명 정도 함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버스에서 기절해서 잠들었지만 한숨 자고 나서도 도착하지 못했을 만큼, 역시나 부산은 멀다. 도착해서 방을 배정받아서 모르는 이들과 어색하게 인사했다. 인사를 하고 보니 그들도 나와 동기처럼 영화과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을 학생회라고 소개했다. 학생회 활동하느라 힘들어서 정말 쉬려고 왔다고 했다. 그들은 언행일치를 실천하는 학생회였고, 정말 쉬다가 갔다. 밖에 영화제가 펼쳐졌지만 방에 있는 티브이로 케이블 채널에서 상영해주는 '아바타'를 보고 있었고, 밀린 잠을 잤다. 이들이라면 학교를 위한 학생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로 돌아간 뒤에 이들의 선거 활동을 돕기도 했다. 지금쯤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까? 선거철이 되면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5. 영화를 포기한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시즌의 부산은 열기가 굉장했다. 충격적인 건 여관이 해운대 바다 바로 앞이라는 거였다.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밖에 나가면 해운대였고, 그곳에는 야외무대가 설치되었고, 영화제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그곳을 배회하다가 금성무와 탕웨이를 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경삼림'과 '색, 계'에 나오는 그 배우들을 눈앞에서 본 거다. 


금성무와 탕웨이는 보았으나, 영화는 보지 못했다. 애초에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세스도 잘 몰랐고, 영화과 버스 안에서 '표를 구하기 어렵다' 정도의 이야기만 주워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포기했다. 같이 간 동기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고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재미난 일을 하자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를 포기한 채 영화제의 분위기를 즐겼다.


6. 부산에 와서 서울에서도 파는 음식 먹기


부산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씨앗호떡이나 밀면 같은 것. 그러나 우리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걸 먹었다. 씨앗호떡 대신에 서울에서도 팔 것 같은 모양의 호떡을 먹었고, 밀면 대신 라면을 먹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씨앗호떡은 따로 먹어본 적이 없고, 밀면은 서울에서 처음 먹어봤다.


돼지국밥은 그래도 2~3번 먹었다. 다만 따로 찾아보고 간 집들은 아니라서 그런지, 서울에서 먹은 돼지국밥이 더 맛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매 끼니마다 모든 게 맛있었다. 허기진 여행자여서 그런 걸까.


7. 해운대 밤바다는 아름다워


당시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라면 해운대 밤바다를 걷는 순간이었다. 넷이서 별생각 없이 해운대 밤바다를 걸었다. 당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힘든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간 여행도 아니고, 딱히 무슨 의미 부여하려고 간 여행이 아니어서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을 거다. 게다가 우리 넷은 서로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알지도 않았다. 그저 우연히 그 자리에 그 시간에 함께 있었을 뿐. 


그런데 그런 우연이 특별했던 것 같다. 너무 뻔해서 특별했다. 이 여행 이후로 모든 여행은 작정하고,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했으니까.


8. 다시 부산에 못 가서


그 이후로 다시 부산에 못 갔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다시 가겠다고, 같이 갈 친구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모든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도 힘들 것 같고, 회사 일이 바빠서 휴가를 내기도 힘들 것 같고. 


당시 여행의 멤버들은 지금 각자의 삶을 잘 꾸리고 있다. 직접 물어본 건 아니고 그렇게 들었다. 아니, 언제나 그럴 거라고 믿고 싶다. 그들은 이때의 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이후로는 주로 혼자 외국에 가는 여행이 대부분이었다. 국내 여행도 안 갔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간 적도 없다. 


"다시는 이런 조합으로, 이렇게 갑자기 여행 올 일이 없다는 걸 알아서 좋았던 걸까."


오랜만에 마주친, 당시 여행의 멤버에게 했던 말이다. 다시는 없을 걸 알아서 좋았던 걸까. 내 삶에 아마 다음 여행도, 다음 부산도 있겠으나 그때와 같은 상황은 다시 오지 않을 거다. 


무계획하고 이상한 여행을 하고 싶다. 특별함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은 여행을. 다음 부산 여행은, 부디.



*커버 이미지 : 부산 여행 때 찍은 사진도 없어서 '부산'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무료공개 이미지를 사용하는 이 상황조차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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