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 May 26. 2017

첫사랑을 묻는다면, 장만옥입니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음악프로그램을 보면 몇몇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며 운다. 그 눈물이 신기했다. 내가 영화를 보며 흘리는 눈물과 같은 성분일까. 그 눈을, 눈물을, 흉내내본다. 흉내내다가 문득 생각한다. 나도 저런 눈빛을 가진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교복을 입던 때였다. 별 이유 없이 케이블채널에서 하는 영화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때였다. 그 날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에 딱히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영화 속 남자가 유덕화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상대배우는 임청하였다. 멋진 배우라고 느꼈고 검색을 하다가 그녀의 다른 출연작 중 한 편을 보게 되었고, 그 작품이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었다. 누군가 내게 베스트영화를 뽑으라고 하면 단숨에 뽑는 영화이자 수도 없이 많이 본 영화인 '중경삼림'을 이 때 처음 보았다.


'중경삼림'에 나오는 임청하 혹은 왕비가 나의 첫사랑이라고 해야할 것 같은 맥락이지만, 그럼에도 첫사랑을 묻는다면 장만옥이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나 자신의 영화지도를 그린다면 그 시작점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이고, 어느새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사람은 장만옥이다. 영화의 시작이 그녀인지 사랑의 시작이 그녀인지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에서 그녀는 주로 기다린다. 아니, 그녀는 필모그래피 내내 대부분은 기다리거나 슬퍼한다.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은 소모적인 역할로 주로 등장했던 그녀의 초기작들에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 '아비정전', 관금붕 감독의 '완령옥'과 같은 작품들에서 웃지 않는 역할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화양연화'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겐 '첨밀밀' 속 그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생에 불쑥불쑥 예고 없이 등장하는 우연의 순간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녀의 표정이 선명하다. 그런 그녀으 표정을 보면서 나 또한 어떤 표정으로 반응해야할지 망설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사춘기 내내 나 또한 나의 감정과 상황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망설였다. 그녀가 짓던 그 표정을 짓기 위해서는 마음 속 어떤 근육이 움직여야 할지 알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제2외국어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중국어를 선택했다. 독일어가 싫어서, 라고 친구들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한 혀의 뒤편에 그녀가 영화 안에서 했던 대사들을 숨겨두었다. 대부분은 기다림에 대한 말들이었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내내 그녀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언어가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고 생각하며 성조를 연습했다. 중국어수업이 끝나고 나면 중국어실력보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늘어있었다. 


이제 중국어는 니취팔러마 말고는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여전히 그녀의 영화를 본다. 내 마음에도 몸에도 그녀로부터 영향 받은 부분이 존재한다. 그녀의 표정을 더 잘 알고 싶어서 흉내내느라 발달한 얼굴의 근육, 매번 특기란에 적는 '기다림', 많이 웃는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 내가 그녀에게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은 영화뿐이기에 구글링으로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는 대신에 영화를 본다.


그녀에게 배운 기다림으로,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다음 작품에서는 그녀가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러므로 첫사랑을 묻는다면 장만옥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