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멋진 어른
멋진 어른을 본 적 있는가? 멋진 어른을 만나는 것은 굉장히 드문 경험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멋진'은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만난 멋진 어른들은 공통적으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다. 자기 행동에 대해 반성도 하고, 부끄러워도 하는 사람.
멋진 어른의 예를 들어달라고 한다면 두 편의 영화를 말하겠다. 하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 또 하나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브레이크'다. 두 감독은 각각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감독이다. 정치성향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치성향과 상관없이 내 눈엔 그저 똑같이 멋진 어른일 뿐이다.
'그랜토리노'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 모두 노인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자신보다 더 약한 이들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그 영향력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버팀목이 되어준다. 자기 자신이 느꼈던 삶의 애환을 후대가 겪지 않도록 그들은 움직인다.
존엄성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본주의 안에서 개인의 존엄성이 위태로워지는 풍경을 그리고 있고, 이런 주제에 있어서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와도 흡사하다. 메세지 이외에도 두 영화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비전문배우가 주인공을 연기하고, 주인공의 이름을 영화제목으로 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로제타와 다니엘, 두 사람 모두 생존을 위해 영화 러닝타임 내내 뛰어다닌다. 소녀와 노인, 사회 시스템은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소득의 상실이 생존권의 박탈로 이어지고, 그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언제나 펼쳐질 수 있는 이야기다. 매순간 자본 앞에 저울질 당하고 있는 존엄이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며칠째 굶은 케이티가 무료로 배급 받은 통조림을 허겁지겁 먹으면서 스스로에게 놀라서 우는 장면이다. 식욕이라는 기본적인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그녀에게 품위 있는 식사는 판타지가 된다. 다니엘이 케이티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녀의 삶 전체를 구원할 수는 없다.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다니엘과 케이티 같은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결국 정부의 역할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다니엘은 계속해서 항의한다.
담배 한 개비의 시간
매일 아침 출근길에 크게 조성된 흡엽공간을 지나간다. 헬멧을 벗고 다음 퀵배달지를 확인하는 사람부터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나오는 사람까지 많은 이들이 정해진 공간에서 비슷하게 생긴 담배를 물고있다. 담배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이들이 돌아갈 곳은 제각각이다.
흡연공간 맞은편 빌딩 입구 쪽에서 처음 듣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눈이 나빠서 현수막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시위를 하고 있다. 입구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이들은 공통의 목표를 두고 연대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삶을 클로즈업 하면 다니엘이 있고 케이티가 있을 것이다.
비겁함
사회에서 갈등은 필수적이지만 그 갈등에 참여하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내가 저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느냐가 계급에 대한, 연대에 대한, 공감에 대한 감수성이 될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과 투쟁 앞에서 자신은 저 상황에 속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거대한 폭력이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덧없는 희망을 뿌리고 정당한 권리를 위한 투쟁 대신 타협을 한 것은 아닐까. '다니엘이었다면'이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는 오늘 나 자신에게 떳떳한 길로 몇 발자국이나 걸어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