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 패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좋은 번역제목의 예
수입되어서 개봉한 외국영화 중에 번역제목이 어색한 경우가 있다. 영화 내용을 함축하지도 못하고 제목 자체의 매력도 떨어지는 제목을 보면, 굳이 왜 이런 제목을 쓰나 싶다. 우디 앨런의 2008년작 'Vicky Cristina Barcelona'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개봉한 게 안 좋은 번역제목의 예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원제는 'Custody'로 양육권을 뜻한다. 실제로 영화는 양육권을 둘러싼 이야기인데 이번에 개봉하면서 번역된 제목이 더 적절하다. '양육권'이 소재라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다. 소재에 대한 관심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곱씹을 만한 영화기에 적절한 번역의 제목으로 느껴졌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기
영화는 팽팽한 양육권 공방으로 시작한다. 양육권 문제의 중심에 있는 소년 줄리앙의 진술서를 판사가 낭독한다. 줄리앙이 서술한 언어들은 엄마를 옹호하고 아빠를 비판하고 있다. 진술서 낭독 뒤에 소년의 엄마 미리암의 변호인과 아빠 안토니의 변호인은 각각의 이유로 서로의 양육권을 주장한다.
두 쪽 모두 설득력을 가지고 이야기하기에 소년의 진술서를 맹목적으로 믿기도 쉽지 않다. 소년의 진술서에 엄마가 개입해서 음모를 짠 걸까, 아니면 진짜 폭력적인 아빠에 대한 이야기일까. 영화 시작부터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게 된다. 소년의 진술서가 아빠를 비판하다 보니, 어느새 아빠에게 연민이 생기기도 한다.
영화 초반에 느낀 '연민'이 영화 후반에 특정 캐릭터를 괴물로 만드는 걸 보면서 섬뜩함을 느꼈다. 우리가 뉴스나 주변을 통해 겉핥기식으로 듣는 이야기의 속사정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이 아니기에 깊게 개입하지 않고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
당신은 진실에 관심이 있나요?
양육권 공방 뒤에 영화는 소년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소년의 눈을 통해 진실이 밝혀진다. 소년의 시선을 따라 가면서부터 영화는 스릴러가 된다.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내내 불안하다.
영화이기에 우린 소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진실에 당도할 수 있다. 즉, 영화가 아니었다면 닿지 못하고 지나갔을 세계라는 말이다.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소년 중에 이런 사연을 가진 이가 존재할 거다. 극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접하지만, 막상 우리 주변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건 드문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타인에게 몰입해보는 경험은 많지 않다. 영화나 문학 등의 매체가 필요한 이유도 결국 타인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다. 그러므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보고 나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나의 편의를 위해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 이후를 상상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진실보다 합리화가 내겐 더 익숙한 방식이 된 것은 아닐까.
폭력의 모양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기예르모 델 토르의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에 이어 2등 상인 은사자상을 받았다. 전자가 현실을 판타지로 풀어냈다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현실을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풀어낸다.
폭력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폭력이 위협적인 모양을 하고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함께 본 친구에게 가장 먼저 했던 질문은 '줄리앙의 엄마와 아빠는 서로가 저렇게 될 걸 알았을까'였다. 비극과 폭력을 상상하며 사랑을 하는 이는 없을 거다. 심지어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조차 자신의 폭력에 대해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연민이 괴물로 변한 자신을 괴물이 아닌 불쌍한 존재로 보이게 만들 테니까.
줄리앙의 누나는 남자친구와 불 같은 사랑을 나눈다. 분명 정열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커플인데 왜 그들의 사랑은 위태로워 보일까. 영화 내내 보였던 폭력의 순간들 때문인지, 마냥 아름다울 것 같은 두 사람의 미래에도 짐작 못할 폭력의 씨앗이 있을까봐 무서워졌다. 그 누구도 폭력을 상상하지 않지만, 이 순간에도 폭력은 일어나고 있다. 폭력은 폭력의 얼굴이 아니라 본 얼굴을 숨긴 채 다가오니까.
부디 이 영화가 안겨준 불안한 예감들이 모두 틀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