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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ul 03. 2018

변산의 소년을 위로해줘!

브런치 무비 패스 <변산>

강해 보이지만 연약한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를 따라 힙합 공연을 간 적이 있다. 아무런 지식 없이 따라갔던 그 공연은 마일드비츠 1집 쇼케이스였다. 지금은 국내힙합이 언급될 때 연관검색어처럼 떠오르는 사이먼도미닉, 이센스, 딥플로우, 팔로알토, 키비, 더콰이엇 등이 무대에 섰다. 팝발라드만 주로 듣던 내게 이들의 음악은 낯설고 매혹적인 세계였다. 사랑이 아닌 내용으로도 가사를 쓸 수 있고, 드럼 스네어 소리가 현악기 소리보다 중독성 있다는 걸 처음 느꼈으니까.


빅딜, 신의 의지, 소울컴퍼니 등 당시 유명했던 언더힙합레이블의 음악들을 찾아 들으면서 몇몇 곡들은 내 사춘기의 주제곡이 되었다. 더콰이엇의 '상자 속 젊음'도 나의 사춘기를 함께한 곡 중 하나다.


넌 술도 잘 마시고 욕도 잘하지만
아무리 거칠어져도 현실에선 강하지 않아
난 남다른 삶을 원하진 않았지만
남과 같은 삶은 더욱 더 원하지 않아

 - 더콰이엇(The Quiett) feat.팔로알토(Paloalto) <상자 속 젊음> 중에서


영화 '변산'의 주인공 학수는 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약한 내면을 가지고 있고, 고향에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고향에 머물러있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어딘가에 갇혀있는 듯 보이는 그의 모습이 시작부터 불안하게 느껴졌다.




오래간만이군요


매일 밤 떠오르는 달과 함께 까맣게
무르익어가는 밤하늘을 보며
가만히 눈을 감고 몇 번이고 당신을 떠올려
참 많이 그리웠던 그대 오래간만이군요

- 제리케이(Jerry.K) <오래간만이군요> 중에서


랩 오디션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에 랩네임 '심뻑'으로 매년 꾸준히 출전 중인 학수. 하지만 늘 일정 이상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로 정신없이 지낸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고향인 변산에 내려가게 된다. 가정에 소홀했던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 때문인데, 내려온 뒤로 경찰서, 동창, 옛사랑 등과 엮이면서 그렇게 떠나고 싶던 변산에 다시 발이 묶이게 된다.


학수는 아버지의 병실에서 자신을 좋아해줬던 선미와 재회한다. 자신의 기억 속에 아주 미미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선미는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변산에 머물고 있다. 공무원이자 소설가로 자리 잡고, 자신이 마주한 문제를 늘 정면돌파하려는 선미. 도망치듯 변산을 떠났던 학수는 변산과 마주 서서 꿋꿋하게 자신의 기릉 가는 선미를 보며 점점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 시작점에서 내 이야기를 하기


잊지마 우리 곁엔 낡은 펜과 공책
이것뿐이면 돼 왜 애써 꾸미려 해
쉽진 않겠지만 빛이 날 그 시간
하나만 보고선 달리자 현실을 믿지마
언제나 처음 시작점을 잊지 말자
진짜 내 이야기를 하는 MC가 되자

- 마일드비츠(Mild Beats) feat. 라임어택(RHYME-A-) <그날 밤, 혼자서, 그곳에 서서> 중에서


학수가 아무리 자신의 고향인 변산을 부정하려 해도, 지금 쓰는 가사의 자양분이 되는 추억도 모두 변산에서 시작됐다. 서울에서 주변 이들에게도 자신의 고향을 밝히지 않지만, 랩 가사에는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가기에 래퍼로 사는 매 순간이 변산을 떠올리는 과정이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던 학수의 아버지가 뒤늦게 학수를 부른 것도 결국 고향인 변산과 학수를 화해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발목 잡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향이라면 왜 그런 것을 느끼는지부터 시작해서 그 문제를 명확히 바라보고, 인정이든 부정이든 제대로 정리해야 새출발이 가능할 테니까. 


변산에 돌아온 뒤로 계속 유예시키고 외면했던 문제와 마주하는 학수. 학수를 좋아하는 선미는 자신도 비슷한 성장통을 겪었기에 학수에게 계속 손을 뻗는다. 너의 답이 무엇이든, 일단 문제를 명확히 바라봐야 하지 않겠냐고. 미운 아버지, 꼴 보기 싫은 고향, 한심해 보이는 자신까지 정면돌파해야 하지 않겠냐고. 


서울에서 혼자 외롭게 있을 때 해결 안 되던 문제들이, 변산에서 수많은 이들의 영향을 통해 점점 개선되어 간다. 함께 소통하는 과정에서 학수의 마음이 점점 열리고, 계속해서 부정하던 자신의 고향인 변산의 이야기를 가사에 쓰기 시작한다. 즉, 진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써본다.



소년을 위로해줘


세상이 선물한 거울을 완전히 닮기 전에
내 그림자를 밟은 오늘을 이제는 기억해.
손을 위로 드는 것, 아니면 감았던 눈을 뜨는 것.
가슴에 심장소리를 여전히 간직하는 당신에게 말해.
이제 당신 안의 소년을 위로해줘.

- 키비(Kebee) <소년을 위로해줘> 중에서


학수는 자신의 가사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길 원하며 랩을 할 거다. 그가 변산에 대해 쓴 가사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큰 힘이 되었을 거다. 자신의 내면 안에 있지만 꺼내지 못했던, 아직 소년인 채로 머물렀던 그 아이와 마주하고 화해하는 과정이니까. 


학수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내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나이를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아주 큰 성장통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 뒤에 어떤 결론이 나도, 당신을 아끼는 많은 이들이 당신을 위로해주고 응원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의 성장기를 함께 해준 노래의 한 구절을 오랜만에 다시 흥얼거렸다. 


"이제 당신 안의 소년을 위로해줘"



P.S. 쓰다 보니 진지해졌지만 '변산'의 장르를 물으면 코미디라고 답하겠다. 이준익 감독 작품 통틀어서 가장 높은 타율의 유머를 보여준다. 웃으면서 위로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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