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없이 살 수 있는 짧은 기간
스무 살의 나는 대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대학교에는 가야 하니 대출을 받아야 했고, '거치 기간'이나 '상환 기간' 같은 용어의 뜻을 알 수 없었지만 검색을 해보면서 학자금 대출을 신청했다. 그렇게 인생 첫 대출을 받았다. 4학기 내내 대출을 받았고, 학교를 그만뒀다. 학교를 그만두고 내게 남은 건 4학기 분의 학자금 대출뿐이었다.
수능을 다시 보고 들어온 학교에서는 이전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서 전략적으로 수강신청을 한 덕분인지, 처음 한 해를 제외하고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받은 4학기의 대출과 다시 신입생이 되어 2학기의 대출을 받았고, 총 6학기의 대출이 학교를 다니며 얻은 가장 눈에 띄는 흔적이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받은 메시지는 대출 이자 납부 기간에 대한 안내 문자였다.
사회에 나왔을 때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나의 학자금 대출 잔액은 내 첫 회사 연봉보다도 많았다. 1년 동안 한 푼도 안 써도 갚지 못할 빚을 품은 채 출퇴근을 했다. 과연 이 돈을 언제 갚을 수 있을까. 이자가 낮은 편이니 천천히 갚으라고 태평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빚을 갚아야만 다른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내년만 되어도 날짜를 기억도 못하겠지만, 2020년 10월 27일에 학자금 대출을 모두 갚았다. 기쁠 줄 알았는데 별 생각이 안 든다. 그래도 다시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갈 일이 없고, 반드시 설치해야 다음 절차로 넘어갈 수 있다고 뜨는 보안 프로그램 때문에 짜증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건 좋다. 야금야금 빠져나가던 이자가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년에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또다시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완납의 기쁨을 즐기지 못하는 걸까. 현재를 즐기기보다 미래를 준비하는 건 내게 익숙한 패턴이다. 만약에 다음에 집을 구하면서 대출을 받게 된다면, 성인이 된 이후 내 인생에서 대출이 없는 기간은 얼마나 될까. 대출은 피와 살처럼 내 몸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될까. 하나의 대출을 끝내니 또 하나의 대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유쾌하지는 않다.
처음 대출을 받았던 때나 지금이나 재테크는 잘 모른다. 모르는 게 자랑은 아니겠지만, 주식이라도 했으면 학자금 대출을 갚기까지 더 오래 걸리지 않았을까. 처음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는 내 몸보다도 큰 짐을 어깨에 얹는 기분이었는데, 다음 대출 때도 비슷할까.
대출 없이 지내는 짧은 기간 동안에도 다음 대출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살겠지만, 마음에 남은 걱정의 잔액도 줄어든 이 시기를 기억해야겠다. 갚기 위해 빌리는 거니까, 결국에는 갚아낸 이 순간을 기억해보자.
*커버 이미지 : 마리누스 반 레이메르스바엘 '환전상과 그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