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따른 20분 체감
-수술 후, 집
눈 수술을 하고 나서 핸드폰과 모니터를 못 보는 상태에서 20분마다 안약을 넣기 위해 시계를 계속 바라봤다. 아날로그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팟캐스트를 듣는 것뿐. 졸아서도 안 되고, 눈을 너무 오래 뜨고 있어도 안 되기에 눈을 열심히 깜빡거리면서, 귀로는 팟캐스트를 듣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흐르는 걸 이렇게 천천히 응시한 적이 있던가. 시간은 이렇게 더디게 흐르는 것이었구나. 평소에 시계를 볼 때는 너무 빠른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보았다면, 지금 이 순간은 시간의 흐름을 바라본다. 늘 점으로 보았던 시간을 선으로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참으로 심심한 거구나.
-새벽, 집
눈 수술한 지 한 달쯤 지난 요즘은 새벽에 눈이 떠진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5시 10분이다. 5시 30분에 일어날 거니까 20분이 남았다. 20분이나 더 잘 수 있다.
막 잠들려고 할 때 알람이 울린다. 2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20분이 지났다.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출근길, 지하철
지하철에서만 책을 읽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이번에 고른 책은 재미가 없다. 다음에 내릴 역과 시간을 자꾸 확인하는 걸 보니 별로다. 새로 산 외국소설인데, 20분 동안 다섯 페이지를 읽었다.
출근은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체감 시간을 줄이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내일은 책을 바꿔야겠다. 출근길에는 천천히 사유할 책이 아니라, 빠르게 정신없이 읽어나갈 책이 필요하다.
-퇴근 후, 헬스장
눈 수술 때문에 잠시 정지해둔 헬스장에 한 달만에 왔다. 항생제를 먹느라 밥을 열심히 챙겨 먹었더니 살이 너무 많이 쪘다. 맞는 바지가 없어서 옷을 살지, 살을 뺄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미 헬스도 등록해두었고, 있는 옷을 입기 위해 살 빼기를 선택한다. 살이 찌니 자존감이 낮아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매트릭스'라고 부르는 운동기구가 있다. 제자리에서 계단을 오르는 운동이라고 보며 된다. 평소에 의자에 앉을 때도 양반다리에 앉는 습관 덕분에 무릎이 안 좋지만, 살 빼기에 이만한 게 없다길래 한다. 오래 하고 싶지만 20분만 하기로 한다. 한 달만에 하는 운동인데 쉬울 리가 없다. 평소에는 스스로에게 가혹하지만, 저질스러운 운동신경 덕분인지 운동과 관련해서는 자신에게 관대하다.
매일 달리기를 하는 지인은 달리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느낀다는데, 운동기구 위에서 내가 느끼는 건 좌절뿐이다. 나의 몸은 한 달 사이에 얼마나 무너진 건가. 한 달 전에도 딱히 좋지는 않았다. 신길역에 내려서 1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는 출퇴근길 환승만으로도 힘든데, 굳이 돈 내고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 걸까.
운동기구에 몸을 맡긴 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움직여보지만 시간은 더디게 움직인다. 계단 오르는 동작만 해도 이렇게 싫은데, 산은 어떻게 오르는 걸까. 20분이라는 목표를 넘어서 산 정상을 향해 높이 올라가야 하는 등산을 왜 하는 걸까. 고등학생 때 현장학습으로 간 등산 이후로 산에 간 적이 없다. 땀 때문에 마스크가 다 젖는다. 마스크라도 벗으면 덜 힘들 텐데. 코로나가 더 미워진다.
20분 동안 몸은 힘들고, 속은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하다. 더디게 힘들고, 더디게 미워하며 보내는 시간. 제일 미워하는 건 불어난 내 몸이다. 매일 20분이 반복되다 보면 살도 빠지고, 나에 대한 미움도 덜어낼 수 있기를.
*커버 이미지 : 바실리 칸딘스키 '블랙 바이올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