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게임의 결과
얼마 전에 술게임을 할 일이 있었다. 술게임이라지만, 나는 눈 수술 때문에 술을 못 마셔서 술 대신 물을 마시는 자리였다. '술게임'이라는 단어도 오랜만이다. 가끔 술을 마시게 되어도 술맛을 잘 모르기에 주변 분위기에 맞춰 조금 마시는 정도다. 술도 오랜만이고, 게임도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적응해본다.
"옆 사람한테 핸드폰을 줘. 그리고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보는 거야. 그중에 한 명을 지정해서, 그 사람한테 '뭐해'라고 연락을 하는 게임이야. 답장을 제일 먼저 받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평소에 전화번호부 정리를 꽤 자주 하는 편이다. 이젠 나와 교류가 별로 없는 이들의 연락처를 굳이 알고 있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다만 관계의 유예기간이 길어서 못 지운 사람도 있고, 업무 때문에 간직해둔 사람도 있다.
"이 사람한테 할게요."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찍은 이름은 낯설었다. 자세히 보니 최근에 함께 작업을 시작한 출판사 대표님이다. 밤은 깊었는데, 늘 공적인 일로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연락을 하다가 '밤에', '갑자기', '뭐해'라고 연락을 해야 한다니.
"뭐하세요?"
결국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나보다 심각해 보이는 사람도 많다. 고등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에게 연락을 한 사람도 있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느라 저장했던 가게 사장님에게 연락을 한 사람도 있다. 답장이 오더라도 난감한 관계들. 나 또한 답장이 오더라도, 어떤 말을 해야 자연스러울지부터 고민한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까, 둘러대는 게 나을까.
"오!"
모여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제일 먼저 울린 건 나의 핸드폰이다. 나는 게임에서 이겼다는 것보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전송 시간과 멘트 덕분인지, 잘못 보낸 거 아니냐는 말을 먼저 꺼내 줘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이후에도 게임은 계속되었다. 주로 주변 사람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전화한 상대에게서 '여보세요'가 아닌 다른 말을 첫 멘트로 듣기, 문자를 보낸 상대에게 빨리 답장받기 등의 게임들. 나의 능력으로 결과를 바꿀 수가 없기에, 불가항력의 술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술자리가 파하고 집에 오면서 든 생각은 좀 더 부지런히 연락처 관리를 해야겠다는 거였다. 다시 연락처를 보는데 아찔했다. 이 사람에게 연락했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싶은 이름들. 술이야 마시면 되지만, 연락 하나로 관계가 이상해지는 건 수습하기도 힘들다.
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어떤 실수로라도 연락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연락처를 정리해야겠다. 아니다, 번호를 바꿀까. 다음에 상상도 하기 싫은 이에게 연락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폰을 술에 빠뜨려서라도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술게임이 끝나고, 번호들을 지우며 집으로 향한다.
*커버 이미지 : 디에고 벨라스케스 '술꾼들(바쿠스의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