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을 떠올리다가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거다. 지금은 별로 왕래도 없는 사촌 형의 집에 놀러 가는 걸 좋아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그들의 컴퓨터에는 게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린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트렌드 새터나 마찬가지였다. 늘 새로운 게임을 만나서 신나는 마음으로 친척집을 갔는데, 그때 내가 만난 게임은 '프린세스 메이커'다. 지금 와서 찾아보니 정확히는 '프린세스 메이커 2'였고, 나무위키에 따르면 시리즈 중 가장 잘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제목 그대로 딸을 공주로 만들기 위해 육성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딸의 이름을 짓고, 딸에게 교육이나 일 등을 시키면서 플레이하다 보면 그에 맞게 엔딩이 나온다. 당연히 공주가 되는 엔딩이 최고의 엔딩이겠으나, 애석하게도 내가 플레이하면서 공주가 되는 엔딩을 본 적은 없다. 다행인 건 굳이 공주가 아니어도 그 엔딩이 나쁜 엔딩은 아니라는 거다. '공주가 되지 못했으니 실패했다'는 메시지라도 나왔다면 어린 나이에 상처 받았겠지만, 딸이 공주가 아니라 그 어떤 직업이 되어도 나름대로 가치 있게 느껴졌다.
나의 경우에는 주로 일을 시켜서 자본을 모으고, 자본이 어느 정도 모이면 이것저것 배우게 하는 패턴을 선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일을 하는 건데, 정작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 일이 직업이 되는 엔딩을 자주 보았다. 청소를 자주 해서 청소부가 되거나, 농사를 자주 해서 농부가 되는 엔딩.
생각해보면 내 삶도 이때랑 비슷하게 흘러간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퇴근 후에 하고 있고, 그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열심히 회사를 다닌다. 이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객전도가 아니라 좀 더 길게 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을 뿐. 어쩌면 게임을 하면서 나는 나의 미래를 점친 건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 배우고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 노동자가 되는 삶.
다만 지금 다시 게임을 한다면, 돈을 모으느라 혈안이 되고 싶지는 않다. 이것저것 배우게 해주고 싶다. 예를 들어서 딸이 잠깐 배운 춤을 너무 재밌어하는데, 정작 춤을 배우기 위해 돈을 모으느라 춤보다 노동에 더 시간을 쏟으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현실에서 그런 건 나 하나로 족하다는 생각. 내 삶은 그러지 못해도 게임 속 딸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건 너무 과몰입인가. 게임은 역시 그저 게임으로 볼 때 재밌게 할 수 있겠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게임을 할 당시 어렸던 나는, 딸 이름을 지을 때 '김세레나'라고 지었다. 어린 내 눈에는 '세레나'라는 이름이 이국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같은 이름의 가수가 있었다.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 속에서 김세레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내가 봤던 여러 엔딩 중 그나마 공주에 가까웠던 건 왕비였다. 앞에서 말했듯 주로 봤던 엔딩은 각종 직업의 장인들이다.
만약에 엔딩에 나온 뒤에 사실 딸의 꿈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좀 더 마음이 아팠으려나. 김세레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기술이 발전해서 게임 세이브 파일 속 김세레나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면, 나를 많이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