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의 긴 하루
가구 회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다. 대표의 기분 따라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마케터로 입사했지만, 예고도 없이 대뜸 나를 디자이너, MD 등으로 소개했다. 거짓말에 적응하고 싶지 않았고, 적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 저희 대리이고요, 회사 MD입니다."
이 날은 백화점에 가구를 입점시키기 위해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직책이 없는 회사였지만 나는 단숨에 대리가 되었고, MD가 무엇의 약자인지도 잘 모르지만 MD가 되었다. 언제 미팅이 잡힐지 알 수 없고, 어떤 거짓말로 나를 소개할지 몰라서 대부분은 안전하게 세미 정장을 입고 출근했다.
내가 아무리 깔끔하게 차려 입고, 아는 척 고개를 끄덕여도 전문 지식을 뽐내는 건 불가능하다. 대표가 거의 모든 말을 한 덕분에 미팅은 무사히 끝났다. 백화점 쪽 직원은 다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직 초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는 게 임무였으나, 성공했을지는 알 수 없다. 백화점 직원이 나를 콕 집어서 질문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여길뿐이다.
"내일은 아마 새벽까지 작업할 테니까 알아둬요."
대표가 어제 예고를 한 덕에 트레이닝복을 챙겨 왔다. 미팅이 있나고 강남에서 판교로 넘어온 뒤에, 사무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요청을 위한 미팅과는 별개로, 팝업스토어를 꾸미기 위해서다. 날이 밝을 때 미팅했던 백화점에서 이젠 야간작업을 해야 한다. 이전에 공장 작업에 갑자기 끌려가서 가구를 포장할 때는 있었지만, 백화점 팝업스토어를 꾸미는 건 처음이다. 몸을 쓰는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운전하면서 다 할 수 있어."
대표는 운전하면서 전화와 카톡을 쉬지 않고 한다. 불안함에 옆에서 신호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대표의 멀티태스킹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죽으면 억울해서 어쩌나. 다행스럽게도 백화점에 살아서 도착했다. 대표가 원망스럽다가도, 굳이 내가 원망 안 해도 저렇게 위험하게 운전하는 건 자발적으로 불행해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영업 종료를 앞둔 백화점 후문에 나와 마찬가지로 작업을 하러 온 이들이 보인다. 다들 능숙해 보인다. 대부분은 대형 브랜드에서 고용한, 전문적인 작업자들로 보인다. 그에 비해 나는 흔히들 구루마라고 부르는 수레를 끄는 방법부터 수레 위에 최대한 많은 가구를 올리는 기술까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많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백화점 주변을 돌아보는데, 낮에 미팅했던 백화점 직원이 나온다. 가서 인사를 할까 하다가 내가 입은 옷을 보고 그러지 않기로 한다. 아마 알아보지 못할 거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을 만나는 사람일 거고, 지금 이 시간에 작업하러 온 사람과 자신이 인사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할 테니까.
백화점의 영업이 끝나면 그때부터 일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오늘은 그러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주차장과 연결된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팝업스토어를 꾸밀 가구와 각종 소품을 옮긴다. 백화점의 화려한 정문과 달리 이러한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엘리베이터의 공간이 많지 않아서 작업자들끼리 경쟁하듯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 와중에도 서로 공간이 나면 조금씩 양보해서 공간을 만들어 누군가를 태운다. 작업자의 마음은 작업자가 제일 잘 아니까.
"가구 안 긁히게 조심해라."
낑낑거리면서 가구를 옮기는 내내 대표의 가구 걱정은 계속된다. 거짓말도 잘하는 사람이 이럴 때는 참 솔직하다. 거짓말로라도 몸조심해서 하라고 격려해주면 좋았을 텐데. 몇 명 되지 않는 팀원이 모두 붙어서 작업을 하지만 작업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대표는 야식으로 패스트푸드 감자튀김을 사 온다. 자신은 위가 작은 여자라면서 평소에도 밥을 잘 안 먹는데, 자신의 기준으로 직원들의 밥을 챙기느라, 밥을 잘 챙겨 먹는 직원의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식은 감자튀김을 입에 욱여넣고 가구를 마저 옮긴다. 가구에 상처가 나지 않게, 기름이 묻지 않게 조심해서.
아침이 되어서야 작업이 끝난다. 내일 바로 백화점 팝업스토어를 관리하는 직원은 집에 가서 씻은 뒤 바로 다시 나와야 한다. 늦게 끝났지만 다들 정상출근이다. 다음 출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백화점의 낮과 밤을 모두 목격하고, 이제 다시 백화점의 아침이 밝았다. 문 열 준비를 하는 백화점 안에서 나의 오늘도 준비한다. 거짓말 같은 하루를 지나, 오늘은 몇 번의 거짓말을 할지 생각하는 하루가 열린다.
*커버 이미지 : 에드워드 호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