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고 생각이 씻겨 내려가지는 않아
비가 오면 생각이 많아진다
시력이 좋지 않다. 마스크에 안경까지 쓰니까 김이 서려서 귀찮아서 안경을 안 쓰고 출근을 했다. 비가 오지만 별일 없이 회사 앞까지 왔다. 회사 바로 앞 횡단보도에 올 때까지 비를 거의 안 맞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방금 했기 때문일까. 회사 횡단보도를 다 건넜다 싶을 때쯤, 물 웅덩이에 빠졌음이 느껴진다. 발목까지 다 잠긴 채 횡단보도를 마저 건넌다. 당황스러워서 헛웃음이 나온다.
회사 근처 편의점부터 가서 슬리퍼를 사고, 화장실에서 신발을 대충 닦아내고 양말을 버렸다. 비 오는 날에는 여분의 양말을 챙겨놓는 편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바지 밑단도 구정물로 다 젖었다. 가방에 늘 넣어두는 휴지로 발을 닦아낸다. 쉬지 않고 차가 지나다니던 물 웅덩이라서 그런지, 괜히 발이 간지럽다. 회사에서 맨발은 허용 안 되지만 제일 먼저 출근한 덕분에 몰래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발을 깊숙하게 책상 밑에 넣어둔다. 신발에 휴지를 끼워두고 마르기를 기다린다. 부디 퇴근 전까지 말랐으면 좋겠다. 점심은 탕비실에 팀 단위로 사둔 도시락을 먹기로 한다.
다음 날도 아침부터 비가 왔다. 전날의 기억을 반면교사 삼고 안경을 쓰고 출근한다. 다행스럽게도 회사에 도착하니 비가 멈췄다. 물 웅덩이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횡단보도를 조심스럽게 걷는다. 젖지 않은 신발에 안도한다.
날씨 어플로 비가 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퇴근한다. 급하게 퇴근하느라 안경 쓰는 걸 잊는다. 안경 쓰는 게 습관이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내 기본값은 나쁜 시력임에도 안경을 벗고 다니는 거다. 역까지는 안경을 쓰지 않고 가기로 한다. 날씨 어플을 완전하게 신뢰할 수는 없으므로 정문을 나와서는 손을 뻗어서 비가 오는지 확인한다.
비가 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전진한다. 천천히 전진하며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있는지 살핀다. 분명 내 손으로 확인했으면서 왜 타인의 행동을 주시하는 걸까. 비가 안 와도 남들이 우산을 쓰면 쓰려고 하는 걸까. 기분 탓인지 비가 조금 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막 퇴근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우산을 쓰기도 하고, 접기도 한다. 나도 우산을 잠깐 펴본다. 우산에 작은 물방울이 묻어난다. 손으로 물방울을 털어내자 가볍게 부서진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역까지 가는 길, 비 때문인지 낙엽이 눅눅하다. 며칠 전까지 단풍에 감탄하기도 했는데, 오래가지 못했다. 가을은 역시 길지 않다. 나무에 걸려있는 단풍은 제법 바삭바삭해 보여서, 먹으며 식감이 좋을 것 같았다. 달콤한 가을의 맛이 날 것 같았는데,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단풍잎은 식감부터 별로 일 것 같다. 비 온다고 탕비실에서 양에 차지 않는 도시락을 먹어서 그런지, 낙엽을 보고도 먹을 생각부터 한다. 낙엽이 물을 먹은 걸 보니, 비가 오긴 왔구나.
비 냄새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물 비린내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낙엽 냄새까지 합쳐지면 가을 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냄새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지하철 손잡이에서 나는 철 냄새나 비 냄새나 비슷한 것 같다. KF94짜리 마스크를 뚫고 맡아지는 냄새가 그리 많지 않다. 내 입에서 나는 냄새만 날 뿐이다. 나는 늘 내게서 나는 냄새가 제일 역하다.
지하철이 노량진역에서 잠시 멈춘다. 안경을 다시 쓰는 걸 잊고, 여전히 안 좋은 시력으로 밖을 바라본다. 평소보다 밖이 더 어둡다. 비가 다시 온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야외에 있는 역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어렴풋이 보인다.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을 보며 비가 오는 것 같다는 예측이 확신으로 바뀐다.
걱정이 많은 나는 365일 우산을 가지고 다닌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가방에 든 우산은 둔 채로 따로 우산을 들고나가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 누군가에게 우산을 빌려 주기 좋지만, 딱히 우산을 빌려줄 일은 없다. 다들 갑작스러운 비에 당황할 때, 혼자 우산을 피고 유유히 걷기도 한다. 태연한 척 걷지만 뿌듯하기도 하다. 평소에 아주 조금의 무게를 더 견딘 덕분에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거나 맞지 않아도 되니까.
비를 맞는 걸 즐긴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우산을 안 가지고 다니려나. 비를 보면 빨래 걱정부터 하는 내게 비를 맞는 건 썩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비를 맞으면 힙스터가 되는 건가. 유행을 따라가는 것도 싫지만, 너무 뒤처지는 것도 싫어하는 나는 퇴근 후 모두들 비를 맞고 가면 우산이 없는 척 그들을 따라 할지도 모른다.
집에 거의 다 와서는 비가 다시 온다. 손에 비가 묻는다. 아마 산성비겠지. 맛을 보면 몸에 중금속이 쌓이려나. 그러나 이게 아니어도 몸에는 이미 안 좋은 게 잔뜩 쌓였을 거다. 비가 오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생각이 더 많아진다. 우산으로 막기 때문일까. 언젠가는 비를 맞아야겠다. 비를 맞아도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기 전에 비타민C를 하나 더 먹고 자야겠다.
*커버 이미지 : 구스타브 카유보트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