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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영화가 좋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는 기쁨

by 김승

"나는 한국 영화 안 봐."


주변에서 꽤 자주 듣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속뜻에 대해 묻는다. 뭘 봐도 다 비슷하니까, 신파가 심해서 등 여러 의견이 나온다. 개인의 취향이니 이에 대해 따로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한국 영화가 좋다. 전 세계 모든 영화 중 한국 영화가 최고다, 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 한국 영화를 좋아할까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편해서'이다. 자막 없이 볼 수 있는 건 정말 편한 일이다. 배우가 하는 말을 들리는 대로 바로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주는 피로감이 훨씬 덜하다. 대사가 많은 외국 영화를 보다 보면 보고 나서 진이 빠질 때가 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자막과 영상에 동시에 집중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기력이 필요한 일이다. 자막 없이 볼 만큼의 영어 실력이 내 삶에 찾아올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등 수많은 언어로 이뤄져 있다.


한국 영화 중에서 음향 상태가 안 좋거나, 배우들의 발음이 잘 안 들려서 자막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영화는 외국 영화 못지않게 피로하다. 좋아하는 국내 배우들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딕션이 좋은 배우들인데, 아마 귀에 대사가 잘 들리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한국 영화의 최대 장점은 자막에 신경을 안 쓰고 오로지 서사에 집중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국내 관객을 집중시키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외국 영화보다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를 봐야겠다는 강박으로 늘 좋은 영화들을 찾아보다 보니,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영화를 볼 때가 많다. 보는 영화의 팔 할은 외국 영화라 자막까지 집중해야 한다. 인물의 뉘앙스를 들리는 대로 바로 못 느끼고 자막을 봐야 한다는 건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분명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보았는데, 피로감을 느끼곤 한다.


나는 이 피로감을 이전에 느낀 적이 있다. 아마 여행 때였던 것 같다. 완전한 이방인이 되려고 간 여행이지만, 통하지 않는 언어 속에서 진이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어폰을 꽂고 한국어로 된 음악을 듣는다. 여행이 익숙해진 뒤로는, 이렇게 진 빠지는 순간을 대비해서 들을 곡을 미리 챙겨둔다. 그저 한국어를 들었을 뿐인데,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음악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가사의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바로 느낄 수 있는데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일 거다.


최근 며칠간은 넷플릭스에서 한국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평이 안 좋아서 보는 걸 미뤘던 '반도'와 '마약왕'까지 다 보았다. 각 잡고 자막까지 쫓아가며 좋은 외국영화를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속 편하게 영화를 보고 싶었다. 자막 없이 편하게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었고, 별생각 없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세상에는 좋은 영화가 많고, 그 영화들을 자막 덕분에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이 1인치 자막의 장벽을 깨자고 말한 건, 자막만 더해져도 자국의 영화를 넘어 더 많은 영화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일 거다.


다만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점점 힘이 든다고 느낀다. 유희를 위해 보는 영화보다 분석을 위해 보는 영화가 더 많은 편이라 그런 걸까. 편히 즐길 수 있는 것도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기에, 나는 앞으로도 한국 영화를 좋아할 것 같다. 좋은 한국 영화가 앞으로 더 늘어나길 바라며 한국 영화를 본다. 자막 없이 볼 수 있는 좋은 영화가 늘어나는 게 가장 만족스러운 상황일 테니까.



*커버 이미지 : 영화 '남산의 부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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