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 day 1 scen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 Dec 25. 2020

상처와 흑역사가 섞인, 메일과 드라이브 정리

메일과 드라이브 정리를 하다

'용량을 90% 이상 사용했습니다.'


지메일을 확인하니 상단에 알림이 뜬다. 딱히 받은 메일이 많지도 않은데 왜 이런 알림이 뜨는 걸까. 2년 전쯤 새로 만든 메일이다. 원래 쓰던 메일은 내게 필요한 메일은 거의 오지 않고, 스팸메일을 삭제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쓴다. 어딘가에 이메일을 입력한 일이 있으면 이전에 쓰던 메일을 입력하고, 정말 필요한 메일을 받을 때는 새로 만든 지메일로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메일에 메일이 많이 쌓이진 않았다. 그러나 알림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이전 메일들을 살펴본다. 일단 '프로모션' 카테고리로 옮겨져 있는 각종 광고 메일을 본다. 주로 이전에 여행할 때 이메일을 입력했던 항공사와 숙소, 관광명소 등에서 온 메일이다. 여행이 불가해진 시대에도 여행사의 메일은 계속해서 온다. 천 개 넘게 쌓인 메일을 지운다. 휴지통처럼 단숨에 비우는 기능이 없어서, 페이지를 넘기면서 삭제한다. 


'포럼' 카테고리를 확인한다. 메일이 몇 개 없다. '받은 편지함'에 두기는 싫고, 그러나 지우기는 애매한 메일들이 존재한다. 지금은 소원해진 이와 사적으로 나눈 이메일도 있고, 이직 준비하면서 면접을 봤던 회사의 면접 안내 메일도 이다. 물론 불합격 소식을 전하는 메일도 함께. 정리하는 김에 모두 지우기로 한다.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고, 어차피 지워도 선명하게 남을 기억일 것을 아니까. 나쁜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지메일 용량은 구글 드라이브 용량과도 관계있기에, 구글 드라이브를 확인한다. 용량이 얼마 안 남았다. 이미 다른 드라이브에 옮겨둔 이탈리아 여행 사진이 보인다. 여행 사진이 귀하다는 이유로 컴퓨터, 노트북, 구글 드라이브, 네이버 드라이브 등 여기저기 중복해서 저장해두었다. 백업은 좋은 거니까. 그러나 구글 드라이브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지우기로 한다. 


브런치에 1일 1글을 시도하기 전에 이미 1일 1글을 시도했던 적이 많다. 드라이브에 1일 1글 폴더들이 꽤 여러 개 쌓여있다. 이전에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썼기에, 워드 파일로 저장해두었다. 부끄러운 글들이 많이 쌓여있다. 그래도 한 문장이라도 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우지는 않는다.


한때는 공유 폴더로 여러 명과 사용했지만, 지금은 나 혼자 쓰는 폴더가 있다. 영원할 것처럼 같이 스터디를 하고 글을 쓰던 이들과 사용했던 폴더다. 떠올리기로 싫을 만큼 큰 상처를 준 이들과 스터디를 한 흔적이 폴더에 남아있다. 지극히 형식적인 파일명인데, 파일명만 봐도 마음이 안 좋다. 생산적인 결과물이 남을 줄 알았는데, 남은 건 상처뿐이다. 언젠가는 자세한 사정을 긴 글로 풀어서 쓰고자 한다. 워드에 아무리 긴 글을 써도 용량이 적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상처 받을 조금의 확률이라도 제거하기 위해, 폴더를 지운다. 한때는 공유되었으나 이젠 내 상처 안에만 살아있는 내용들을.


메일과 드라이브 정리를 하고 나니 용량이 많이 남았다. '선택'과 '삭제'만 눌러도 빠르게 정리된다. 마음에 마우스라도 꽂아서 정리를 하고 싶다. 듣기 싫은 말은 스팸 처리해놓고, 상처 받으면 삭제하고 싶다. 이런 식의 상상이 아니면 정리가 안 된다는 게 야속하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새로운 스팸 메일이 오고, 앞으로도 상처 받을 일은 많을 거다. 


정리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책을 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저 다시 한번 지메일에 용량을 비우라는 알림이 왔을 때, 정리를 하다가 내 상처를 상기시킬 흔적을 발견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정리가 중요한 것도 결국 마음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 명의 친구에게 똑같은 우정을 줄 수는 없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