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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Dec 25. 2020

크리스마스에 한 이별

특별한 날의 헤어짐

"특별한 날에 이별해 본 적 있어?"


아이러니한 질문이다. 이별은 언제 해도 꽤나 '특별한' 이벤트니까. '특별한'이라는 단어는 좋은 일에만 쓰이는 건 아니다. 이별은 그 자체로 꽤나 거대한 이벤트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별이 가진 특이점을 자랑하듯이 말하기도 한다. 이별을 겪고도 단단해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지, 떠올려보면 멋진 이별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되지 않아도, 이별의 날은 어떤 달력을 봐도 기억할 수 있다. 날짜는 희미해도 그 풍경은 크리스마스 날짜처럼 단숨에 떠오른다.


크리스마스에 이별을 한 적이 있다. 날짜를 잊고 싶지만 크리스마스 날짜를 잊는 건 불가능하다. 몇 년도인지 잊고 싶지만 그것도 실패한다. 왜냐하면 아침에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정우의 먹방 장면으로 더 많이 기억된 나홍지 감독의 '황해'를 봤다. 산타가 유럽 어딘가를 돌아다닐 것 같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당시 연인과 영화 '황해'를 보았다. 


당시에 로맨틱 코미디가 개봉했을 확률이 높았지만, 나는 극장에서 장르 상관없이 늘 완성도 높은 영화를 보고 싶었기에 '황해'를 선택했다. 생각해보면 당시 연인과 봤던 영화는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머리 아픈 아트필름도 많이 봤다. 아마 혼자 봤다면 졸았을지도 모를 영화들. 어려운 영화를 같이 보는 대신 아직 서툰 서로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면, 이별은 좀 더 뒤로 유예되었을까. 이런 가정법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발동된다. 


오전에 '황해'를 보고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다가 근처에서 돼지국밥을 먹었다. 당시 연인과 가장 자주 먹던 메뉴다. 특별한 날이라고 유별나게 굴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평소에는 별로 손님이 없던 돼지국밥집에 사람들이 많았다. 양식집에 웨이팅이 길어서 이곳으로 다들 온 걸까. 사정이 어찌 되었든 돼지국밥은 맛있다. 소면과 부추를 가득 넣어서 먹는다. 후식으로 카운터에 있는 박하사탕을 깨물어 먹었다. 바로 카페에 갈 것 같지만, 당분은 아무리 채워도 모자란 기분이다.


돼지국밥집 근처에 있는 던킨도너츠에는 사람이 많다. 크리스마스지만 데이트는 평소처럼 진행된다. 자주 갔던 극장, 밥집, 카페를 차례로 온다. 던킨도너츠에서 우리는 많이 울었다. 


"우리 크리스마스인데 헤어지는 건가."


당시 연인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자세히 어떤 대화를 한 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에 굳이 이별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많이 싸우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함을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사이였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서툴까, 나중에는 이 서툰 부분이 사라질까.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헤어졌다. 이별의 장점은 딱히 서툴 게 없다는 거다. 헤어진다는 명확한 결론만 있을 뿐. 서툰 관계였지만 이별을 꽤나 능숙하게 이뤄졌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


생각은 부정적으로 간다. 생각이라는 말로 유예해도, 끝은 정해져 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크리스마스가 아닌 다른 날에 만났어도 우리는 헤어졌을 거다. 크리스마스는 제법 큰 이벤트라, 과거의 이별 말고도 떠올릴 게 많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가 아닌 날 이별했다면, 아무렇지 않은 날에 괜한 의미부여를 하고 더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 하면 생각나는 노래의 가사다. 이젠 서로의 작은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사이지만, 잘 살고 있으면 좋겠다. 크리스마스에 과거의 이별 같은 거 생각할 틈도 없이 행복하다면 좋을 거다. 축복하고 싶다.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니까.



*커버 이미지 : 리플 로나이 조제프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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