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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Dec 31. 2020

극장이 필요한 건,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일지도

영화와 집중력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가장 큰 취미는 언제나 영화 감상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취미 중에서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책은 손으로 넘겨야 하고, 무엇인가를 만들 때도 바삐 움직여야 하지만, 영화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영화를 가장 많이 본 건 수능이 끝난 뒤였다. 당시에는 하루에 3~5편 정도의 영화를 본 것 같다. 닥치는 대로 봤고, 덕분에 그 당시 본 영화가 지금 내 취향의 자양분이 되어줬다. 하루에 여러 편을 봐서 그런지, 지금도 몇몇 영화는 줄거리가 뒤섞여있다.


영화를 집에서 많이 본 건 수능이 끝난 뒤지만, 극장에서 가장 많이 본 건 대학생이 된 뒤였다. 매주 광화문 씨네큐브나 지금은 없어진 스폰지하우스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봤다. 당시에는 그게 꽤나 있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에 다니고, 내 미래에 대해 무엇 하나 할 수 없지만, 극장에 가면 멍하니 바라볼 영화가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지금도 광화문 씨네큐브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 중 하나다.


코로나 이후로는 극장에 거의 안 갔다. 올해는 10번도 못 갔다. CGV 앱으로 상영작을 확인하는 게 습관이었는데 올해 중순쯤에는 앱도 지웠다. 오히려 OTT 앱을 보는 시간이 더 늘었다. 영화를 본다는 게 극장에서 집으로 완전하게 넘어온 느낌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폰으로 보는 건 답답해서 모니터로 본다는 거다. 


크리스마스도 그렇고, 회사에서 조기 퇴근한 올해의 마지막 날도 그렇고 시간이 나면 영화를 본다. 요즘은 쉬는 날이면 하루에 영화를 세 편씩 본다. 오늘도 퇴근 후에 세 편의 영화를 보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한동안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힘들어했는데, 요즘 들어서 영화 보는 게 다시 흥미로워졌다.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접근성도 한몫했을 거다.


다만 집에서 모니터로 영화를 본다는 게 최상의 영화감상 환경이 아니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일단 핸드폰의 유혹은 무시하기 힘들다. 영화가 조금이라도 지루해지거나 하면 핸드폰으로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영화 전개상 중요한 부분인데도 일시정지를 누르고 냉장고를 뒤지거나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한다. 취향에 맞지 않는 영화를 만나면, 방금까지 봤던 유튜브의 흥미로운 영상들이 떠오른다. 


집에서 영화를 보면서, 극장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극장이 소중한 가장 큰 이유는 '강제성'이 아닐까 싶다. 나의 경우에는 영화 상영 도중 화장실을 가기 싫어서 물도 잘 안 마시는 편이다. 집에서는 졸리면 영화를 정지하거나 자버리지만, 극장에서는 졸리면 잠에서 깨려고 노력한다. 극장에 온다는 게 내게는 일상적이라기보다 특별한 이벤트로 느껴져서, 영화 한 편을 골라서 신중해진다. 집에서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를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일 수밖에 없다. 구독료만 내면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넷플릭스와 상영작과 좌석을 골라서 정해진 시간에 보는 영화관은 다른 게 당연하다.


아무리 별로인 영화여도 극장에서 보게 된 이상 끝까지 본다. 여태까지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를 봐도 극장에서 도중에 나온 적은 없다. 집에서 봤으면 별로였을 영화도 극장의 큰 스크린과 소리 때문에 흥미롭게 본 경우도 많다. 극장에서 재밌었는데 집에서 보니 재미없는 영화, 집에서 보면서도 극장에서 봤으며 훨씬 재밌을 거였다고 아쉬워하게 되는 영화를 본 경험은 대부분 있을 거다.


집은 폰부터 냉장고까지 나를 유혹하는 게 너무 많다. 그에 비해 극장은 오로지 스크린뿐이다. 극장은 집에 비하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집에서는 누워서도, 서서도 볼 수 있지만 극장은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봐야만 하니까. 내게 극장은 적당히 불편한 장소이고, 그러므로 집중할 수 있는 장소다. 집에서 편한 영화를 보면 그 끝은 침대에서 잠들어버리기일 확률이 높지만, 극장에서는 어떤 영화를 봐도 끝은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년 소원이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코로나가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극장이 사라질까 봐 두렵다. 영화산업이 세상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하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기 가장 좋은 장소가 극장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내게 영화는 '편하기 위해서' 보는 게 아니라 '몰입하기 위해서' 보는 거다. 마치 글을 눈으로만 읽고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집에서 영화를 보는 날이 늘어나지만 영화가 머리에 잘 안 들어올 때가 많다. 


내년에는 마음 편히 극장에 가서 적당히 불편한 채로, 깊게 몰입하고 싶다. 이왕 보는 영화라면 최상의 환경에서 즐기고 싶으니까. 상영 전 광고가 끝나고 불이 완전히 꺼진 뒤 두근거리는 그 마음을, 끝난 뒤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황홀함을 느끼는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다.



*커버 이미지 : 영화 '맹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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