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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an 14. 2021

나는 어떻게 맵찔이가 되었나

생애 첫 비빔면과 잃어버린 매움을 찾아서

생애 첫 비빔면과 잃어버린 매움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들렌을 먹으며 과거를 회상한다. 400쪽도 읽기 벅찬 내게, 4,000쪽 분량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도전조차 엄두가 안 나지만, 마들렌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건 알고 있다. 매일 네 문장 쓰기도 힘든데, 어떻게 하나의 소설을 14년 동안 쓸 수 있을까. 


마들렌도 살면서 몇 번 안 먹어보았고, 어떤 음식 때문에 4,000쪽 분량의 과거를 떠올리지도 않는다. 다만 며칠 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 내 삶의 여정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건 바로 비빔면이다. 2021년에, 비빔면을 처음으로 먹어보았다.


비빔면은 많은 마니아층을 가진 라면이다. 판매량으로 보나 선호도로 보나 인기 있는 라면 중 하나다. 라면을 좋아해서 한 때는 매일 먹었고, 지금도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먹는다. 이상하게도 비빔면에는 별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 주로 국물이 있는 라면 종류로 새로 출시된 라면을 챙겨 먹었음에도, 비빔면과는 거리를 둔 채 살아왔다.


왜 사람들은 비빔면을 좋아할까.


먹지 않기에 공감하지 못하다가, 우연히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과 유튜브 채널에서 비빔면을 먹는 모습을 연달아보았다. 처음으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에 없던 비빔면을, 이제 내 삶 안에 끌어와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했으나, 먹는 것 앞에서는 고민보다 실행이다.


매웠다.


첫인상과 끝 인상 모두, 매웠다. 패키지 디자인을 보니 내가 아는 비빔면의 디자인이 아니다. '매운맛 비빔면'이었다. 하필이면 매운맛으로 비빔면을 시작하게 된 거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탄수화물이 먹고 싶어 진다. 단백질은 안 된다, 탄수화물이어야만 한다. 매운 걸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맥반석 계란보다는 연유빵이 맞을 거다. 내 몸은 그렇게 기억해왔기에, 식탁 위에서 혀를 진정시키기 좋을 만한 탄수화물을 집어든다. 매운 걸 진정시킨다는 건 좋은 명분이다. 가족들이 나눠 먹어도 족할, 꽤나 큰 사이즈의 연유빵을 혼자 모조리 먹어치운다. 하루에 하나 마시던 요구르트를 네 개 마셨고, 요플레를 두 개 먹었다. 오랜만에 많이 매운 걸 먹었고, 덕분에 매운 걸 희석시킬 수 있는 더 많은 것을 먹었다. 매운 음식은 마치 세트 음식 같아서, 후속 음식들을 부른다. 


나는 왜 맵찔이가 되었는가.


비빔면을 먹으면서 내가 왜 매운 것을 잘 못 먹게 되었는지 생각학 되었다. 한때는 매운 걸 잘 먹느냐는 말에 자신 있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금은 함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어서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잘은 못 먹어요'라고 답한다. 


맵찔이가 된 지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이런 내가 낯설다. 매운 것에 능숙하다고 자부하며 지냈던 세월이 더 길기 때문이다.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는 매콤한 라면 한 젓가락만 먹어도 가족들의 환호를 얻어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후에도 쭉 매운 음식을 좋아하며 살아왔다. 남들이 맵다는 음식도 음미하며 먹어왔으나, 너무 많은 매우 음식을 먹어서 그런 건지 매운 것을 받아들이는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땀이 나고, '맛있다'보다 '아프다'의 감각이 더 크게 올 때면 매운 걸 잘 먹던 시절이 찬란한 과거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매움도 상향평준화되었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불닭볶음면을 먹었는데, 먹으면서도 이건 자기 학대와 같다고 느꼈다.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걸 맛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매운 걸 즐기고 있다. 그러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매움에 서툰 사람이 되었다는 걸. 엽기떡볶이를 시키든 무슨 떡볶이를 시키든 가장 안 매운맛을 선택하고, 혹시 몰라서 '덜 맵게 해 주세요'라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게 된 거다.


다행스럽게도 매운 걸 먹지 못해도 맛있는 음식은 여전히 많다. 조금 매운 정도까지는 소화해낼 수 있으므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떡볶이를 계속해서 먹을 수 있다. 이번에 처음으로 먹은 비빔면은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기에, 매운맛만 아니라면 즐겨먹을 수 있을 듯하다. 매움에 대한 능숙함을 다시 찾지 못해도 여전히 먹을 건 많다. 매움의 기준이 다를 뿐, 여전히 매콤한 걸 좋아한다. 


점점 더 매워지고 있다. 경쟁하듯 매운 음식은 더 나오고 있고, 나는 필요 이상의 매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 내가 매움에서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뭘까. 통쾌함일까 시원함일까. 확인을 위해서, 다시 매운맛으로.



*커버 이미지 : 마크 로스코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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