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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an 12. 2021

우리 집은 왜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아?

영화 속 집의 모양

지난 주말에는 밀린 숙제 풀듯이, OTT 서비스를 통해 그동안 못 본 한국영화들을 보았다. 2020년에 좋은 평가를 받은 한국영화들 중에는 유독 데뷔작들이 많았다. 정진영 배우가 감독으로 데뷔한 조진웅 주연의 '사라진 시간', 유아인과 유재명이 주연한 홍의적 감독의 '소리도 없이',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거제도를 배경으로 찍은 오정석 감독의 '여름날', 올해 여러 영화제 수상 소식을 알린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 영화를 정식으로 배운 적 없다는 조민재 감독의 '작은 빛' 등 각각의 특색을 가진 데뷔작들이 등장한 2020년이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을 보면서 눈에 가장 많이 들어온 건 '집'이다. 영화에서 집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집이 주된 배경인 영화의 경우에는 집이 인물과 사건을 지켜보는 가장 가까운 목격자로 느껴진다. 코로나 때문에 열흘 가까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봐서 그런지 몰라도, 인물들 만큼이나 집에 자꾸 눈이 갔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면 자연스럽게 집 안 곳곳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영화 속 인물들이 특정 공간에 오래 머물면 자연스럽게 그 공간의 디테일에 관심이 간다. 


현실에 있을 법한 집을 등장시키는 건 인물을 구축하는 것만큼이나 영화에서 중요한 일이다. 영화의 공간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공간과 가까운, 내 기억에 있는 공간들을 떠올렸다. '여름날'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 거제도에 내려온 승희는 삼촌 집에서 창고처럼 쓰이는 컨테이너 안에서 지내는데, 아침에는 컨테이너 옆 닭장에 있던 닭이 마음대로 들어오기도 한다. '여름날'에 등장하는 컨테이너는 군생활의 절반을 컨테이너에서 보냈기에 군대 시절을 떠올렸다. 미래에 대해 무엇 하나 정하지 못한 승희의 마음이나 군인이었던 나의 마음이나 별 다를 게 없다. 현재의 고민을 유예시고 싶어서 도망치듯 군대를 갔었는데, 고향에 내려온 승희가 간 장소 중에는 왕의 유배지였던 거제 둔덕기성(폐왕성지)가 등장한다. 


'남매의 여름밤' 속 남매는 방학을 맞이해서 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에 들어오게 되는데, 남편과 싸운 고모까지 집에 합류하게 된다. 어릴 적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의 집을 떠올렸다. 남매 중 누나인 옥주는 할아버지의 건강 관련 문제와 할아버지 소유인 집과 관련해서 마음대로 의논하려고 하는 아버지와 고모에게 의문을 갖는다. 왜 할아버지의 것을 할아버지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네들끼리 정하는 걸까.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잘 이해가 안 간다. 초등학생도 알만큼 상식적인 이야기에 답변을 할 수 없을 만큼 속물이 되었을 때, '어른의 사정'이라는 비겁함을 만능카드처럼 꺼내는 게 아닐까.


어릴 적에 광고나 드라마를 볼 때마다 했던 생각 중 하나는, 왜 우리 집은 화면 속 저 집처럼 아름답지 않느냐는 거였다. 특히나 공중파 드라마의 세트가 돌려막기 식으로 비슷하던 시기였다. 극 중 가난하다고 설정된 인물의 집조차 깔끔하고 넓을 때가 많았다. 놀러 간 친구네 아파트는 늘 어수선했는데, 광고 속 아파트는 잡동사니가 하나도 없었다. 이사할 때마다 잡동사니 때문에 트럭을 한 대 더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내게, 넓고 깔끔한 공간은 그 자체로 낯설었다. 


2020년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집들은 '오늘의 집' 메인 페이지에 뜰만큼 아름답지 않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배우 소피의 집 정도가 그나마 깔끔한데, 찬실이가 가사도우미 일을 하루라도 하지 않는다면 금방 엉망이 될 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위적으로 아름답지 않아서 장면들에 더 빠져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집이 좀 더 아름답다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하고 화려한 규모의 집이 등장해도 쉽게 몰입할 수 있으려나. 영화가 삶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삶이 영화 같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처럼 살고 싶다'는 말에는 적당한 허영이 들어가 있고, 당연한 일이다.


올해 목표인 독립을 이뤄낸다면, 아마 작은 공간일 거다. 도어록이 아니라서 열쇠를 가지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고, 집들이는커녕 내 몸 하나 눕히면 끝일 공간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집에서 소품을 사는 것보다 벌레 퇴치에 더 열을 올리고 있을 상상을 한다. 확실한 건 독립 후에도 영화를 볼 거다.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가 대부분일 거고, 집이 등장할 거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할 거다. 왜 나의 집은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을까, 혹은 저 집은 내가 살았던 그 공간과 참 닮았네,라고. 


영화처럼 살기는 이미 힘든 것 같으므로, 삶과 닮은 영화를 찾아본다.



*커버 이미지 : 영화 '남매의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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