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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an 20. 2021

생활이 만든, 세 번째 손가락의 굳은살

나의 아름다운 신체 - 세 번째 손가락

세 번째 손가락은 정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손바닥을 보든 손등은 보든, 세 번째 손가락은 세 번째 손가락이다. 거꾸로 해도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다. 작년에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에는 'TENET'이 있다. 거꾸로 해도 같은 단어라는 것 이외에는 별 뜻 없는 단어다. 세 번째 손가락이 왜 세 번째에 위치해있는지 묻지 않는 것처럼, 해석하려고 하면 할수록 난처해지는 영화였다.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은 나의 생활습관이 잘 드러나는 손가락이다. 유일하게 굳은살이 있는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10대 때는 연필 잡는 습관 때문에 굳은살이 생겼다. 처음에는 자국 정도만 남는 것 같더니, 점점 커지고 굵어진다. 굳은살의 원리는 잘 모르겠으나, 살을 분명 누르고 있는데 왜 더 커지는 걸까. 왜 내가 연필을 잡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굳은살도 이유 없이 자리를 잡았다. 허락도 없이 세 번째 손가락을 내어주게 되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기에, 손톱으로 굳은살을 뜯으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대학생 때까지도 제법 열심히 필기를 했다. 그러므로 이십 대까지도 세 번째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다만 교복을 입던 때에 비하면 필기를 하는 시간은 극히 일부였다. 강의 때만 열심히 적고, 강의에 따라서는 손 대신 입을 쓰는 경우도 많았다. 입술이나 혀에는 굳은살이 생기지 않았다. 열변을 토하던 교수님의 입술 양옆에는 버짐이 핀 것만 같았다. 세 번째 손가락의 굳은살이 부드러워진 걸 느낀다.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연필을 잡을 일이 거의 없다. 누군가는 연필과 종이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메모를 핸드폰이나 컴퓨터에 다시 옮기는 게 귀찮아서라도 그런 시간을 거의 가지지 않는다. 카페에 가서 지인과 나라 이름 맞추기 빙고 같은 걸 하지 않는 이상 연필은 쓰지 않는다. 연필로 그림이라도 그려볼까 하고 그림 그리는 모임을 나가보았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세 번째 손가락에 굳은살이 짙어질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집에서는 그 어떤 손가락도 편애하지 않고 공평하게 모두를 사용해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핸드폰 액정은 손목이 아파서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손가락도 번갈아가며 누른다. 


손가락이 잘려도 굳은살은 유지가 되는 건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굳은살을 보며 상상한다. 영화 '블루벨벳'의 주인공은 잘린 귀를 발견한다. 잘린 신체를 보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 영화 전개를 위해서는 궁금해해야 한다. 실제로는 도망가는 게 정상일 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 앞에서 도망칠 줄 알아야 한다. 잘린 손가락을 보고 몇 번째 손가락인지, 이 굳은살이 어쩌다 생긴 거지 추측하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손가락이 썩는 동안에도 굳은살은 늦게 썩으려나. 쳐다도 못 볼 거면서 이런 의문을 갖는다. 마주치지 않을 걸 알기에 하는 상상.


아니 왜 기분 나쁘게 가운데 손가락으로 그러세요.


내가 아는 어른은 세 번째 손가락을 자주 이용한다. 대부분은 두 번째 손가락으로 하는, 특히나 누군가는 지칭할 때 일상적으로 세 번째 손가락을 애용한다. 그 덕분에 많은 오해를 받는다. 손가락 욕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오해를 부르는 습관이라, 옹호도 해줄 수 없다. 습관이라는데, 나쁜 습관이면 바꿔야 하지 않을까.


때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습관입니다. 지인의 세 번째 손가락에 불만을 품은 이는 말했다. 습관은 변명이 될 수 없다고. 그렇게 따지면 모든 게 합리화가 될 테니까. 폭력도, 살인도 습관이라고 말하고 변명할지 모르니까.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기에 습관이다. 불만을 품은 이는 조상 중에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다리를 너무 떨어서 복이 다 나가서, 그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팔자를 못 고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를 참다못한 이 조상의 지인이 조상의 다리를 잘랐고, 더 이상 다리를 떨 수 없게 되어서 팔자를 폈다는 게 결말이었다. 잘린 귀를 발견하고 시작하는 영화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손가락을 애용하는 지인은 자신의 팔자에 대해 생각했을 거다.


굳은살 보여드릴까요.


세 번째 손가락을 보여주는 건 늘 조심스럽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해본다. 굳은살이 많이 사라졌다. 최근에 굳은살이 작게 새로 자리 잡았는데, 31일에 반값 할인하는 배스킨라빈스의 가장 큰 사이즈를 뉴욕 치즈케이크로 가득 채운 다음에 퍼먹었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를 할 때는 오후에 퍼먹고, 퇴근한 날에는 저녁에 퍼먹고, 주말에는 오전부터 퍼먹다 보니 세 번째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겼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낼 때마다 세 번째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굳은살이 생겼다. 볼이나 배에 갈 살이 세 번째 손가락에 몰린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굳은살 안에 뉴욕 치즈케이크가 들어있을 것만 같다. 냄새를 맡아보는데, 숟가락에서 묻어나는 쇠 비린내가 날 뿐이다. 


나의 다음 굳은살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세 번째 손가락의 굳은살을 만져보면서, 나의 과거를 유추해본다. 연필 대신 숟가락이 만든, 노트 대신 뉴욕 치즈케이크를 바라보다가 생긴 굳은살. 세 번째 손가락은 결국 어떤 모양으로 끝을 맞이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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