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 day 1 scen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 Jan 19. 2021

나를 대표하는 두 번째 손가락

나의 아름다운 신체 - 두 번째 손가락

두 번째 손가락, 이라는 말을 듣고 헷갈릴 때가 있다. 이때의 두 번째는 엄지 손가락 옆에 있는 검지를 말하는 걸까, 새끼손가락 옆에 있는 약지를 말하는 걸까. 검지와 약자라는 말조차도 어떤 손가락을 말하는 건지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다. 손등을 바라면서 각 손가락의 이름을 떠올리다가도, 손을 뒤집어서 손바닥을 보면서 방금까지 알던 손가락의 순서가 바뀐다는 게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 이라고 관용적으로 쓰는 말들이 떠오른다. 손바닥을 뒤집는 건 너무 쉬운 일인데, 이처럼 쉽게 다루어지는 일들이 있다. 쉽게 뒤집어지면 안 되는, 순서가 중요한 일들이 손쉽게 뒤집어지고 유지해 온 순서가 뒤집힌다.


운 좋게도 나의 손가락은 다섯 개다. 아직까지 다섯 개를 유지하고 있고, 날카롭거나 무거운 것을 볼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손가락이 사라지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만약에 다섯 개의 손가락 중에 하나를 잃어야만 한다면, 같은 과격한 질문이 들어올 때면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압도적인 활용도를 가진 건 두 번째 손가락이다. 두 번째 손가락, 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다. 건초염인지 터널인지 손목 통증인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통증이 손목에서 느껴진다. 


매일 열심히 두 번째 손가락을 쓰는데 왜 손목이 아픈 걸까. 두 번째 손가락은 손목에 비하면 얇고 가볍다. 두 번째 손가락과 손목이 싸운다면 손목이 이길 거다. 그러나 두 번째 손가락은 손목을 자신의 몸으로 삼아서 휘두른다. 작다고 지는 건 아니다. 위치가 중요하다. 뇌는 작지만 몸을 지배한다. 직접 느끼지는 못하지만, 뇌가 진짜 내 머리 안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모님이 그랬고, 선생님이 그랬고, 교양 프로그램이 그랬고, 나무위키가 그랬으므로 믿기로 한다. 뇌가 없으면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니, 뇌가 없다고 말을 하는 건 모순이다.

 

뇌를 믿기로 했으므로,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기고 지배하는 것도 믿게 된 거다. 다시 말하지만 위치가 중요하다. 위를 선점하거나 앞을 선점해야 한다. 빨리 가서 고지를 선점해야 한다고 배웠다. 부모님이 그랬고, 선생님이 그랬고, 군대가 그랬고, 회사가 그랬으므로 믿기로 한다.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위를 향해 빠르게 달려야 한다. 오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만 달려야 한다. 달리는 척이라도 해야 박수를 받을 수 있다. 나보다 작은 상사가 박수를 친다. 상사의 작은 손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상사가 책상을 친다. 옆 나라의 지진보다 무서운 진동이 나의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상사가 두 번째 손가락을 움직여서 나를 부른다.


까딱까딱.


두 번째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누르다가 중지하고 상사에게 간다. 우리 건물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두 번째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누른다. 왼손잡이인 우리 팀 동료는 왼손으로 마우스를 잡는다.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을 사용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이 낯설다. 그리고 우리와 달랐다. '우리'는 다수다. 다수에 포함되면 우리가 될 수 있다. 나는 다행히도 우리다. 오른손의 두 번째 손가락을 사용하므로 나는 우리가 되었다. 팀 동료는 왼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있으므로 우리가 될 수 없다. 두 번째 손가락이 우리의 조건이 된다. 


그가 손을 뒤집는다. 손바닥이 하늘을 향한 채, 마우스를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누른다. 그는 이제 두 번째 손가락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 우리가 되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조건은 두 번째 손가락이 아니라 오른손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전제 조건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월급을 받으려면 우리에 속해 있어야 하고, 우리에 속해있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제한되어있다. 


까딱까딱.


상사가 두 번째 손가락을 쓰는 사람들을 부른다. 두 번째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부르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기도 하고, 방금까지 두 번째였던 걸 네 번째라고 말한다. 손목은 두 번째 손가락보다 약하지만, 그가 손바닥 뒤집듯 말하는 걸 막기 위해서는 손목을 못 쓰게 만들 필요가 있다. 손목을 못 쓰게 된다면 몸을 뒤집어서 손바닥을 뒤집게 될까.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는 사람은 말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걸 중지하지 않을까. 우리는 몸을 보고 배운다. 말도 못 하는 아이들이 자기 몸을 보고 배우니까. 내가 그랬고, 우리가 그랬고, 상사도 그랬을 거다. 


상사는 나의 뇌보다 위에 있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같은 손가락 개수를 가지고 있다. 나는 상사의 손목 정도는 될까. 과장님이 고개를 조아린다. 고개를 상사의 무릎까지 숙인다. 과장님이 무릎이라면 나는 아직 멀었다. 손목이 아니라 발목도 안 되는 거다. 손가락을 생각할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 발가락 정도에 있는 사람인 거다. 여름에도 구두를 고집하는 상사의 발가락을 본 적이 없다. 


부탁입니다, 발가락을 보여주세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아직 발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발바닥에서 발가락 정도까지 올라왔으므로,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아마도 내 머리 안에 있을 뇌로도 알 수 있다. 고작 두 번째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누르는데 쓰는 뇌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까딱까딱.


매일 마우스를 누르고 핸드폰 액정을 누르고 코를 쑤실 때나 쓰는 두 번째 손가락이지만 내구력이 제법이다. 거울에 보이는 얼굴은 두 번째 손가락보다 덜 사용하는데 왜 더 빨리 닳아버린 걸까. 얼굴에 두 번째 손가락이 달려있으면 좋겠다. 고개를 숙여서 마우스를 만지고 핸드폰을 누른다. 두 번째 손가락으로 피피티를 만들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린다. 두 번째 손가락이 나를 대표한다. 두 번째 손가락으로 카톡과 인스타 프사를 바꾼다. 소개 문구도 바꾼다.


나를 대표하는 두 번째 손가락.





매거진의 이전글 어색함과 침묵도 대화의 요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