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 day 1 scen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 Jan 22. 2021

퇴근하고 이어폰을 끼면 회사원 모드 off

회사원 모드 on/off

지난 주말은 고통스러웠다. 회사에서 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주 동안 일이 급격하게 늘어났고, 시작도 전에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파일을 열기도 전인데, 걱정은 이미 PPT로 쳐도 100장은 될 분량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걱정을 정리해서 보고하면, 무사히 결재 완료 메시지를 볼 수 있으려나. 


금요일 퇴근은 기분 좋아야 하지만, 걱정을 집까지 들고 왔다. 영화를 볼까 했으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평소에 웃으며 봤던 채널들의 영상을 보는데 좀처럼 웃을 수 없었다. 걱정이 나를 잠식한 게 느껴졌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하소연은 하지 않는다. 주변에 말한다고 해결은 되지 않고 상대에게 걱정만 전염시키는 거라고 생각하기에, 혼자 앓는 게 속 편하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예전에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이문재 시인의 글이었다. 이문재 시인은 첫 시집을 내고 나서도 잡지 기자 생활을 병행하고 있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쓰자고 했으나 쉽지 않았는데, 퇴근 후에도 일에 대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문재 시인이 선택한 건 모자를 쓰는 일이었다. 퇴근 후에 모자를 쓰면 그 순간 자신은 월급쟁이가 아니라 시인이 되는 거라는 마음으로. 즉, 모자를 쓰는 시간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인 거다.


모자를 써볼까, 생각이 들었다. 모자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집에는 산 지 14년 된 모자만 하나 있을 뿐이다. 모자가 아니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평소에 하지도 않는 짓을 하면 부자연스러워서 제대로 실행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래서 내게 고정적으로 이뤄지는 출퇴근 루틴을 떠올렸다. 하나뿐이었다. 음악을 듣는 것.


집에서 나오자마자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다. '출근곡'이라는 게 존재한다. 보통 7시쯤 집에서 나오기 때문에, 겨울에는 제법 어둡다. 집에서 역까지 걸어갈 때는 차분한 곡으로 머리를 정리한다. 회사 앞에 이르러서는 마지막으로 꼭 밝은 곡을 듣는다. 최대한 업된 기분으로 들어가고 싶어서다. 대부분은 좋은 기분으로 들어가도 텐션이 떨어질 확률이 높으니까. 회사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퇴근할 때가 있으므로, 밝은 기운을 귀에 집어넣고 출근한다. 


회사에서는 상사들이 언제 부를지 모르기 때문에 이어폰을 끼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다만 출퇴근 때는 늘 이어폰과 함께다. 그러므로 회사원 모드로 ON/OFF를 하게 하는 장치가 있다면 이어폰인 셈이다. 출근을 위해 이어폰을 끼는 순간 회사원 모드로 ON, 퇴근 후 다시 이어폰을 끼는 순간 회사원 모드는 OFF 되고 다시 일상의 나로 돌아온다. 


지난 주말에는 퇴근 후 이어폰을 낀 채로도 일 생각을 하고 걱정을 했다. 억지로라도 걱정을 줄일 필요가 있다. 강제로라도 OFF를 하는 것. 그래서 퇴근 후에는 이어폰을 낀 순간부터 무조건 일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일이 나의 일상을 잠식하는 걸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일과 일상, 둘 다 망칠지도 모르니까.


걱정이 가득했던 주말이 지나 출근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걱정들은 생각보다 잘 해결되었다. 막상 마주하고 나니 못할 일도 아니었고,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결과도 좋았다. 걱정했기 때문에 잘 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차고 넘치는 걱정을 굳이 원동력으로 쓰고 싶지는 않으니까. 걱정 활용법보다는 소각법을 더 먼저 배워야 할 것이므로.


퇴근길에 이어폰을 낀다. 이제 나는 나에 집중한다. 집에 가서 쓸 글의 주제를 생각하고, 이번 주에 볼 영화를 정해 본다. 이 시간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 불쑥 불안이 올라오고 회사원 모드가 ON이 되려고 해도,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나를 잃으면, 회사원 모드의 나도 잃게 된다. 나를 이루는 많은 부분은 생산성에 대한 것일지도 몰라도, 나를 지탱하고 버티게 하는 건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즐기는 순간이니까. 


그러므로 퇴근 후에는 무조건 OFF. 이어폰을 끼고, OFF.



*커버 이미지 : 르네 마그리트 '데칼코마니'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는 내 글을 읽고 있을 거라는 신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