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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Feb 07. 2021

눈이 예쁘게 깎였네요

눈도 삶도 깎여나간다

원추각막 수술 후에 한동안은 매주 병원에 갔다. 눈이 나아짐에 따라서 매주에서 격주로, 몇 달이 지난 지금은 한 달에 한번 병원에 간다. 지난 주말에는 한 달만에 안과에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코로나도 여전하고, 코로나가 사라질 거라는 희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선착순으로 진료를 보기 때문에 진료가 있는 날은 늘 일찍 집에서 나온다. 버스에 앉아서 멍 때리고 풍경을 바라본다. 주로 집에만 머물기에 바깥 풍경을 보는 재미가 크다. 유튜브로 '불멍'을 찾아서 보는 것처럼 풍경을 멍하게 바라본다. 어제 본 액션 영화보다도 흥미롭게 느껴진다. 마음먹어도 닿을 수 없는 풍경을 보는 것과 마음먹으면 발 디딜 수 있는 풍경을 보는 건 다른 감흥을 가지고 있다. 


"눈이 예쁘게 깎였네요."


한 달만에 만난 의사의 말은 묘하게 들린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잔인하게 들릴 만한 말이다. 원추각막 수술은 뾰족해진 각막을 깎는 수술이기에, 틀린 말은 아니다. 의사가 자주 쓰는 표현일 거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눈을 깎았을 거다. 마치 조각하는 마음으로, 눈을 예쁘게 깎기 위해 노력해왔을 거다. 회복이 잘 되고 있다는 뜻이기에 안도한다. 


며칠 뒤면 회사원으로 돌아온 지 1년이 된다. 돌아올 때만 해도, 패잔병의 마음이었다. 보란 듯이 성공적인 프리랜서가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남들 눈에 가뜩이나 늦은 나의 커리어는 더욱더 늦어졌다. 타인의 기준으로는 내 인생은 모든 면에서 느리기에, 귀를 닫고 사려고 노력하는데 타고난 나의 귀는 어찌나 얇은지. 


입사하고 얼마 안 되어서 코로나가 터져서, 재택근무를 한 날이 출근을 한 날보다 더 많다. 모든 업계가 힘든 와중에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급은 생각보다 달콤하다. 명절에 나오는 상여금이나 보너스는 회사에 다니는 큰 이유가 되어준다. 상여금을 주는 회사를 처음으로 다녀본다. 누군가는 상여금이 너무 적다고 하소연 하지만, 처음인 내게는 상여금의 존재 자체가 고맙게 느껴진다. 


"예쁘게 깎였네요."


회사에 들어와서 눈이 깎였고, 삶의 모양도 깎였다. 불규칙적이었던 프리랜서 시절과 달리 규칙적으로 생활해야만 했고, 일이 없을까 봐 불안해할 일도 없다. 자유는 줄어들었지만, 나란 사람이 적당한 규칙 안에서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막연한 자유 앞에서 불안했음을 인정한다. 내가 원한 자유로운 생활과 거대한 꿈은 마치 조각을 하듯 많이 깎여나갔다. 깎여나간 그 모습이 예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보기에 위태로워 보이진 않는다. 


다시 회사에 돌아올 때 결심한 건, 내 인생에 더 이상 퇴사는 없다는 거다. 이직은 있을 수 있겠지만, 뛰쳐나가듯 퇴사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런 글을 쓰고 있다니, 합리화에 능해졌다. 나를 지키기 위한 합리화라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할 거다. 삶의 모양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만들 거다. 깎인 눈으로 보는 지금 내 삶이 나쁘지 않다. 


예쁘게 깎인 눈으로 내 삶도 좋게 해석하고 싶다. 의사 대신 내가 나에게 말하기로 한다. 이 정도 삶이면, 엉망인 삶을 제법 괜찮게 깎아놓은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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