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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ul 11. 2021

나의 첫 반바지

내가 반바지를 좋아하게 되기까지

의복과 관련해서 어릴 적부터 이상한 편견이 많았다. 예를 들면 중학생 때까지는 남방은 어른의 옷으로 보여서 남방을 입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와이셔츠를 입은 어른들을 보면서 생긴 편견일까. 지금은 티셔츠보다도 남방을 더 좋아하지만, 당시에는 남방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제한했다.


반바지 또한 입지 않았다. 반바지는 20대 중반까지도 안 입었다. 반바지는 편견 때문이 아니라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어린 내가 봐도 내 뚱뚱한 몸에서 내 다리는 너무 굵었고, 나이가 드니 거기에 다리털까지 더해졌다. 남들보다 굵고 다리털이 무성한 다리를 보여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긴바지를 입어도 기장이 짧아서 살짝 발목 위쪽이 드러나는 것조차 경계했다. 


그렇게 반바지는 내게 입어서는 안 되는 의복이 되었다. 평소에 열이 많아서 겨울에도 좀 걷다 땀이 나는 사람이지만, 여름에 반바지는 없는 선택지였다. 더위가 절정인 여름에도 집 앞 편의점에 갈 때도 긴 바지를 챙겨 입었다. 비가 오는 날에 밑단을 다 적시면서도 긴 바지를 고수하는 게 가장 곤욕이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딱히 무슨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반바지가 예뻐 보였다. 내게 없는 선택지였기 때문에 호기심까지 더해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반바지를 입으면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여전히 내 다리털은 무성하고, 피부도 하얀 편이라 그게 더 도드라졌다. 


"내가 반바지를 입어도 될까?"


당시 대외활동을 함께 했던 여자 동생 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친구들은 나를 올리브영으로 데려가서 바르는 제모약을 알려줬다. 그리고 요즘 남자들이 반바지를 많이 입고, 다리털이나 그런 걸 신경 안 쓰는 사람이 많다며 안심시켜주었다. 이 나이 먹고도 이렇게 남을 의식 많이 하다니. 생각이 많아지는 가운데 제모약을 집어서 계산했다.


집에 와서 제모약을 설명서에 따라 사용해봤다. 피부 위에 발라놓고 기다리면 녹아버리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매끈한 다리를 가져본 건 처음이었다. 오히려 너무 매끈한 다리도 썩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살도 예전보다 빠졌기에 반바지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옷장에는 무채색 옷이 가득했고 첫 반바지도 검은색을 선택했다.


반바지를 입었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세상이 나의 걱정에 비해 내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 이후로는 꽤나 뻔뻔해졌다. 역시 처음이 힘들지 익숙해지면 두려울 게 없다. 나의 다리털은 엄청난 속도로 자라났고, 제모약의 파괴력이 몸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어느새 다리털도 방치되었다. 숱이라도 쳐줄까 싶지만 머리숱도 관리 안 하는데 다리털을 관리하는 건 벅찬 일이다.


해가 쨍한 여름, 당연하게도 반바지를 입고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역 안에 앉아있었는데 3~4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자신의 할머니와 함께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내 다리털을 쥐어뜯으면 말했다.


"할머니, 이거 뭐야?"


할머니는 아이의 호기심과 질문에 익숙한 듯, '너도 나중에 크면 그렇게 된단다'라고 말했다. 가끔 다리털이 거의 안 나는 축복받은 사람도 있던데 이 아이도 그렇게 되려나. 아이야 너도 곧 몸에 털이 나고 군대도 가고 그래야 한단다. 말할까 하다가 그냥 웃어주기로 한다. 내 다리털을 자신의 손가락에 감아서 야무지게 굴리는 아이에게 어떤 행동을 해야 좋은 어른일까 고민하다, 아이의 호기심이 진정될 때까지 다리털을 잠시 내어줬다. 굳이 아이가 아니어도 지금도 주변에서 다리털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많다. 다리털 왜 이렇게 많아? 


"꼰대 같아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반바지 입으면 안 돼요. 규정은 아니어도 우리 팀은 그런 분위기 아니에요."


이직한 회사는 복장이 자유이기 때문에 여름에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임원진도 팀장님도 반바지를 입고, 복장이 자유라는 것도 확인했기 때문에 선택한 거였다. 그런데 바로 위 대리님이 입지 말라고 한 이후로는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 여러 의문이 들지만, '까라면 까는 게 회사'라고 입에 달고 사는 분이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한다. 내 다리털이 회사의 정책에 위배되는 수준이었을까.


올해 여름은 더 습하게 느껴진다. 여전히 나의 기본 의복은 반바지로, 회사를 제외하고는 반바지를 입고 다닌다. 다리털도 많고, 굵고, 상처도 많지만, 이제는 이게 익숙해졌다. 독립하고 사는 지금의 동네는 약속 장소로 유명한 곳이라 늘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제는 이곳을, 누가 봐도 집에서 입는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닌다. 들켜서는 안 되어서 숨겨야 할 것 같던 다리털은 이제 너무 뻔뻔하게 드러내서 남들도 그러려니 한다.


그 사람, 반바지를 좋아했죠.


동네가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던 내 모습으로 나를 기억하지 않을까.



*커버 이미지 : Amedeo Modigliani 'Boy in Short P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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