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내가 해결해야 한다
발레를 하고 나면 땀범벅이 된다. 가뜩이나 땀이 많은데, 안 쓰던 근육을 쓰니 땀이 더 나는 기분이다. 진도가 무척이나 빠르게 나간다. 몸이 하나의 동작을 익히기 전에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고, 하나의 동작 안에도 목, 배, 허리, 손, 팔 등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하나를 신경 쓰면 하나가 무너진다. 퇴근하고 밥도 안 먹고 발레를 하는데, 평소였다면 요란하게 꼬르륵거렸을 배가 집중하느라 얌전하다.
발레 스튜디오는 집 근처이기에 수업이 끝나면 샤워도 안 하고 바로 집으로 간다. 어차피 집까지 10분 정도는 걸어야 해서, 그 정도만 걸어도 땀이 나기 때문이다. 땀에 절어있는 상태로 사람들이 넘쳐나는 거리를 걷는다. 몸에서 땀 냄새가 안 나기를 바라며, 걸음의 속도를 높인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할 일이 또 있을까 생각하다가, 내일 아침에 먹을 바나나를 편의점에서 산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옷을 벗어서 말린다. 빨래 바구니에 젖은 채로 넣으면 냄새가 날 게 뻔하기에 무조건 말려야 한다. 외출할 때는 갑작스럽게 비가 오면 대처할 수 없기에 창문을 닫아두는 편이라,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오늘은 어젯밤에 이불빨래도 하고 일기예보에서 비 올 확률이 없다고 해서 창문을 열어두고 갔다. 집이 열로 가득하기에 창문을 닫고 에어컨과 선풍기를 틀어둔다. 샤워는 금방 마칠 테고, 샤워를 마치자마자 시원함을 느끼고 싶으니까. 가방 정리를 하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 두고, 보일러 온수 버튼을 누르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샤워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물이 문제가 아니라, 불이 문제다. 잘만 켜지던 화장실 등이 나갔기 때문이다. 세입자이기에, 별 문제가 아니기를 바라며 등을 만져본다. 전구를 오랜만에 만진다. 일단 전구는 들고나갈 준비를 한다. 말리려고 널어둔 옷을 다시 입고, 보일러와 에어컨, 선풍기를 모두 끈다. 마스크도 다시 쓸 일이 없을 줄 알고 버렸기에, 새 마스크를 쓴다. 슬리퍼를 신으면 발등에 물집이 잡히지만, 급하니 일단 신고 나가본다.
그런데
전구를 어디서 사야 하지. 주로 철물점에서 샀는데, 동네에 철물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물론 다이소까지 가는 것도 방법이다. 다이소에 가려면 다시 집에 들어가서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슬리퍼를 신고 다이소까지 갔다가는 물집 때문에 발레 하기가 힘들 거다. 동네 슈퍼에서 팔 확률이 높은데, 동네 슈퍼는 쓰레기봉투를 사러 한번 가본 곳뿐이다. 일단 슈퍼로 가기로 하는데, 집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이 보인다. 꽤 규모가 큰 편의점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본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오스람 전구를 발견한다. 혹시 몰라서 손에 들고 온 전구와 비교해보니 사이즈도 맞을 것 같다. 편의점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 편의점 택배도 보낼 수 있고, 쓰레기봉투까지 팔아서 멀리 있는 슈퍼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이제 전구가 수명을 다하면, 전구를 사러 집 앞 편의점에 오면 된다. 편의점에 모든 게 있어서, 어딘가를 새롭게 가볼 생각을 안 하고 편의점으로만 가는 건 편리한 동시에 내 동선을 획일화시킨다. 이 동네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편의점을 너무 선호해서는 안 된다.
예상보다 빠르게 집에 복귀한다. 편의점에서 사 온 오스람 전구는 이전에 쓰던 전구보다 더 밝은 빛을 뿜어낸다. 밝아지니 화장실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비롯해서 더러워진 부분들이 잘 보인다. 주말에는 화장실 청소부터 해야겠다.
"독립하면 온전히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내야 해."
설거지부터 청소까지, 모두 내가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일어난 일들이고 선택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그런데 전구가 나가는 건 전혀 예상 못한 일이다. 온전히 혼자서 많은 변수를 만날 거다. 사실 이 정도는 변수라기에도 아주 작은 일이다.
가족과 함께 살 때는 집 안 어딘가에 늘 여분의 전구가 사이즈별로 있었다. 나도 내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마련한 여분의 물건들이 많은데, 미쳐 챙기지 못한 것들이 많을 거다.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챙길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은 앞으로도 계속 업데이트가 될 거다.
'어떤 일이든 내가 혼자서 온전히 해내야 한다.'
앞으로 내가 감당할 일이 어떤 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을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 책임감이 썩 무겁기보다는 기대하게 만든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게 늘어난다는 것만큼 근사한 것도 없으니까. 근사한 자취인을 향해, 비상용 전구를 사둔다.
*커버 이미지 : Robert Frederick Blum 'The Toi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