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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ul 08. 2021

지도 앱 안 보고 집까지 갈 수 있겠어?

동네를 몸으로 외워나가기

길눈이 밝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어릴 적 생각하던 길눈이 밝은 사람과 지금의 길눈이 밝은 사람은 좀 다른 느낌이다. 지도 앱이 보편화되면서, 지도 앱만 잘 봐도 길눈이 밝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나다. 지도 앱이 지금처럼 활성화되기 전만 해도, 나는 길치에 가까웠다. 지금은 척척 길을 잘 찾는데, 그건 전적으로 지도 앱 덕분이다. 마치 해외여행 시에 구글 지도를 실행할 수 없으면 길을 잃게 되는 것처럼, 지금도 지도 앱이 없으면 길을 못 찾겠다고 느낄 때가 많다.


"XX 아파트 지나서 오면 돼."


오늘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지인은 만날 위치를 설명하며 내게 특정 건물을 말했다. 이제 독립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어떤 건물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 집 근처를 탐험하지도 않았고, 집 앞 편의점이나 출퇴근 때 가는 지하철역을 제외하고는 딱히 가 본 경로 자체가 드물다. 


집에서 사방으로 길이 나있지만, 내가 가는 길은 늘 정해져 있다. 과연 시간이 지난다고 그 경로가 얼마나 늘어날까 싶다. 볼거리 많은 동네로 이사 왔는데, 집에만 있을 거면 왜 굳이 이 동네에 왔나 싶기도 하고. 서울도 여행하듯이 다니겠다는 목표는 코로나 때문에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다. 왜 안 돌아다니냐는 물음에 코로나를 핑계로 대본다.


자주 가는 길조차도 간판보다는 지도 앱을 주로 본다. 내가 잘 가고 있는지,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아있는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경주마에 가깝다. 목적지만 본다. 어딘가로 가는 길을 즐기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목적 없이 외출을 하면 좋을 텐데, 내게는 목적 없이 무엇을 한다는 게 익숙한 일이 아니다. 목적과 결과를 지향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독립의 목적은 여유 찾기인데, 애초에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여유 만들기'가 좀 더 적합한 말이다.


약속을 잡을 때도 '어디 건물 앞에서 보자' 보다는 지도 앱으로 위치를 찍어서 링크를 보내는 게 익숙해졌다. 프랜차이즈가 몇 블록 사이로 함께 위치하기도 하기에, 좀 더 정확해질 필요가 있다. 동네 주민끼리는 서로 건물 이름만 말해도 알아들어야겠지만, 내게는 아직 그 정도 동네 정보가 없다. 나 대신 당근마켓에 누군가 올린 '마라탕 잘하는 집 있나요' 같은 글을 보며 정보를 얻을 뿐.


"집까지 가는 길 알지?"


오늘 만난 지인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한 선배라 친동생에게 묻듯이 집까지 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저 이제 지도 안 보고도 갈 수 있어요."


오늘은 집까지 지도 앱을 안 보고 가보기로 한다. 쭉 가다가 신호를 건너고, 세탁소가 보이면 왼쪽으로 가고, 가다가 국숫집이 보이면 오른쪽으로 가기. 지도 앱으로 볼 때 '세탁소에서 왼쪽', '국숫집에서 오른쪽'이라고 생각해두고 걷던 습관 덕분인지, 몇몇 포인트들이 머리에 입력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간에 한번 길을 잘못 들뻔했으나, 결국 지도 앱을 켜지 않고, 데이터를 아끼고 집에 도착했다. 


독립의 최고 장점은 성취감을 느낄 만한 작은 일들이 많다는 거고, 오늘의 성취라면 지도 앱을 안 보고 집까지 온 거다. 걱정이 많은 편이라, 다음에 또 갈 일이 생기면 지도 앱부터 확인하게 될 거다. 다음에 내게도 여유라는 게 생긴다면, 지도 앱 없이 무작정 오래오래 걷고 싶다. 코로나부터 더위까지 핑곗거리가 많은데, 확진자가 어마 무시하게 늘어나고 더위와 장마가 겹쳐서 습한 날씨는 무작정 걷기를 늦출 꽤나 괜찮은 명분이다.


동네에 있는 어떤 가게 등에 대해 말할 때 능숙하게 답하고 단숨에 그곳까지 갈 수 있을 만한 데이터가 내 몸에 서서히 입력될 거다. 평생을 산 본가 근처에도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살았는데, 다르게 살기 위해 나왔으니 이번에는 동네를 열심히 돌아다녀봐야겠다. 지도 앱을 확인하지 않아도 동네를 잘 아는, 동네에 능숙한 어른이 되어야지.



*커버 이미지 : Claude Monet 'Walk (Road of the Farm Saint-Simé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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