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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Mar 16. 2018

최악의 영화 촬영 현장

나는 나를 지키고 그들을 원망할 것이다

학교에서 창작 수업을 들을 때면 학기가 끝날 때쯤 수강생 대부분과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가 된다. 서로의 작품을 공유하고 합평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긴다. 몇 년 전에 소설 수업을 함께 듣는 영화과 학생이 있었다. 서로 농담 몇 마디 정도 할 수 있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그가 내게 한 가지 요청을 했다. 자신의 졸업작품에 출연해줄 수 있냐고. 난 역할에 대해 따로 묻지 않고 호의적인 그에게 알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에 그의 졸업작품에 연출부로 참여 중인 스텝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양주 세트장으로 저녁까지 오라는 내용이었다. 재밌는 경험 한다는 생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세트장으로 갔다. 집에서 꽤 먼 거리였고, 촬영이 끝나면 밤일 거라 대중교통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스텝에게 물어보니 촬영이 끝나면 따로 차로 태워줄 예정이라고 한다. 


졸업작품이라고는 하지만 규모가 꽤 컸다. 다음 촬영 장면을 세팅하는 스텝들과 배우들이 보였다. 스텝의 안내에 따라 감독에게 가서 오늘 찍을 장면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내가 찍을 장면은 두 개였다. 하나는 오열, 하나는 자위. 


역할에 대해 제대로 묻지 않은 나의 잘못이었을까. 지금 못하겠다고 해도 차도 없는데 어떻게 나가야 하지.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내 앞에 카메라가 세팅되고 상대역 배우가 앞에 앉아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카메라에 얼굴이 나오는 것은 나뿐이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스텝들이 시계를 보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감독은 잠시 촬영을 멈추고 나를 따로 불러낸다. 세트 뒤에서 그가 담배를 물며 말한다. 


"내 현장 망치러 왔어요? 이거 나한테 엄청 중요해요. 근데 지금 뭐하는 짓이야."


분명 내게 하는 말인데 내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됐다.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그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지금 기분 나빴죠? 농담 반 진담 반이긴 한데, 이 기분 가지고 연기해봐요."


나는 영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것은 연기지도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것쯤은 구별할 수 있다.


다시 카메라 앞에 서서 몇 분 지나지 않아 오열에 성공했다. 지금 내 상황을 곱씹으니 의도하지 않아도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 수 있었다. 내가 울어야 카메라 뒤에 서있는 스텝들이 다른 장면들도 찍고 집에 갈 수 있다. 내가 나를 지키려 하는 것이 마치 다수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이런 상황이 내 삶에서 다시는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며 울었다.


탈진하듯이 울고 나서 자위하는 장면을 찍었다. 카메라 뒤로 서있는 스텝과 눈에 마주친다. 희곡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이다. 다음 주에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할까. 아니, 저 사람은 내게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


촬영이 끝난 배우들끼리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현장에 준비된 승용차에 탔다. 차 안에는 어떤 여자분이 운전석에서 자고 있었는데 스텝한테 들어보니 감독의 어머니였다. 차에서는 내내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몇 달이 흐르고 영화과 졸업영화제에 초대한다는 문자가 왔다. 촬영이 끝난 날부터 내게 그 영화는 삶에서 없는 작품이다. 부당함 앞에서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은 지금도 몸 안에 피처럼 돌고 있다. 존엄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 날 몇 뼘 정도 죽었다. 그것이 손톱만큼일지언정 그 현장에서 박탈당했던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지키고 그때의 그들을 원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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