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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Mar 16. 2018

상사의 친구를 데려다주다

야근하고 집 가는 길에 택시를 돌리다

지금의 회사는 비교적 합리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에 다니던 회사는 야근이 당연했다. 새벽에 퇴근하고 카카오택시를 부르다가 실패한 뒤에 선릉역 쪽으로 나가서 다른 이들과 경쟁하듯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나의 퇴근길 풍경이었다. 택시가 안 잡혀서 성수대교까지 걸어갔던 적도 있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그 날도 택시를 타고 성수대교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리를 중간쯤 건넜을 때 전화가 왔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내가 모시는 팀장이다. 모신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진짜 미안한데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남편이랑 다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런데 괜찮으면 청담 쪽으로 좀 와주라."


거절은 내게 없는 선택지다. 업무가 하나 늘어났다는 생각으로 택시를 돌려달라고 한다.


청담역에 내려서 팀장이 보내준 주소로 간다. 도착해 보니 고급스러운 술집이있다. 들어가서 카운터에 있는 사람에게 팀장의 인상착의를 말하고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그가 말해준 방 안에 들어가니 팀장과 쓰러져 자는 사람이 함께 있다. 테이블에는 예쁜 술병들이 많았다. 예쁘므로 비싼 술이겠지. 스탠딩 마이크도 있어서 팀장이 노래하는 상상을 했다. 늦게 오길 잘했다.


내 임무는 명확해 보인다. 취한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 팀장은 내가 예상한 임무를 자신의 입으로 확실하게 공표한다. 게임 속 퀘스트 수행 중인 캐릭터처럼 이제 이것을 해결해야만 돌아갈 수 있다.


선릉과 마찬가지로 청담도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다. 통성명도 안 하고 내 등에 업혀 있는 취한 사람은 계속 내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안 들으려고 해도 귀에 쏙쏙 박히는 말들은 하나 같이 못난 단어들이다. 길에서 택시를 몇 십대 보내고 나서야 탈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청담술집보다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물이다. 매달 주택청약 통장에 2만원씩 넣으면서 전세집을 꿈꾸는 내게 이런 곳을 일상에서 누리는 이들의 세계는 낯설다. 지금 내가 업고 있는 사람의 상태를 봐서는 비싼 술 먹고 모르는 이의 등에 업히는 것이 그들 세계의 풍경인 듯 하다.


어쨌거나 취한 사람을 집에 무사히 데려다줬으므로 나의 임무는 끝이 났다. 상사는 택시 타고 가라며 5만원 지폐를 줬다. 집까지 택시비가 2만원 정도 나올 테니 3만원이 이번 임무의 보상이다. 야근수당이 안 나온는 회사를 생각하면 새벽의 꿀알바를 한 기분이다. 이번달 주택청약 통장에 2만원을 넣고 편의점 도시락 두 개를 사먹을 수 있는 돈이 생겼다.


팀장과 내가 서로 호출한 카카오택시를 기다릴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함께 말하고 있지만 내 역할은 반응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셨구나, 많이 힘들셨겠어요, 저라도 속상했겠어요.


내가 부른 택시가 먼저 와서 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뜬다. 회사에서의 내 모습을 생각한다. 칼퇴한 팀장이 남겨둔 업무를 새벽까지 처리하고, 새벽에 카톡이 올까봐 긴장하며 잠자리에 들고, 눈 뜨자마자 회사 메신저를 확인하고, 업무에 대한 권리는 없지만 책임은 져야하고, 처음 하는 일이지만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비난 받는다. 자신의 실수에 관대한 팀장은 내가 저지른 실수에 폭언을 하고, 똑같은 아이디어도 내가 말하면 한 귀로 흘리고 대표가 흘리듯 한 말은 주워 담는다.


팀장으로 인해 겪는 일들에 대해 말할 때 회사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성인 대 성인인데 왜 그 사람 말을 듣고만 있어요?"


그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이미 노예가 되었는 걸요.'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충실하게 따르는 역할을 부여받았는 걸요. 왜 나의 존엄성은 노동의 시간과 비례하게 깎아나가나요. 당신은 이런 나를 보호하지 못했잖아요. 당신은 약자였던 적이 없잖아요.


가장 두려웠던 것은 어느새 내가 팀장을 닮아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노동과 성과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


오늘도 전보다 나아진 나의 노동환경에 대해 안도한다. 그와 동시에 지금도 누군가의 삶을 '일'이라는 핑계로 무너뜨릴 그 사람을 떠올린다. 당신은 오늘도 누군가의 세계를 아무렇지 않게 붕괴시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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