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무서웠던 그 여자의 사정
“아우, 쟤가 왜 남자 주인공인데?” 어릴 적 드라마를 보며 자주 했던 생각이다. 그때 당시의 드라마 남자 주인공들은 싸가지 없고 툴툴거리는 ‘나쁜 남자’ 스타일이 많았는데 난 그게 정말 별로였다. 다정다감한 서브 남자 주인공에게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었고 그 캐릭터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게 화가 나서 보는 걸 관두는 어린 시청자였다.
그 어린 시청자는 생각했었다. ‘내가 쓰고 싶다’ ‘내가 쓰면 저런 놈은 남자 주인공으로 안 해’ 단지 주인공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쉽게 열받는 어린이였던 나는 드라마 작가를 참 많이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런 원망의 감정을 계기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초등학생의 그런 생각은 크지도 깊지도 않아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정도의 사소한 것 일뿐이었다. 스스로 글을 써본다던가 배워보고 싶다고 말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글쓰기 관련해서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불손한 동기와 행운이 더해져 얼떨결에 받게 된 상이다. 그 대회에 참가하면 학교를 빠질 수가 있었고 여러 부문 중 시를 택했는데 빨리 쓰고 놀자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기대감도 없고 부담감도 없이 써 내려가서였을까, 그 대회 시 부문의 장원을 받았었다. 장원이라는 큰 상에 ‘나 재능 있나? 좀 열심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 법도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였다.
상을 받았던 건 우연이 가져다준 잠깐의 행운이었을 뿐이다. 실력이 아니란 걸 인지하고 있었다. 노력 없이 찾아오는 행운은 한 번도 많은 법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글쓰기를 시작할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법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난 너무 쉽게 지나쳤고 이제야 아쉬워하고 있다.
성인이 된 후로 나는 참 이것저것 많이 배워보고 시도해 보며 살았다. 한번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흘려보내고, 이거다 싶으면 붙잡았다. 그렇게 내가 뭘 잘하는지, 어려워하는 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난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한다. 그 무언가는 그림일 수도 공예품일 수도 있다. 나는 창작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 스쳐 보내던 글쓰기라는 단어가 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창작의 중심에 글쓰기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형태로 창작물을 만들던 글쓰기가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았다. 그렇게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거기서 멈춘 내가 있었다. ‘글쓰기를 누구한테 배워? 내가 쓴 걸 본다고? 아… 싫은데 ‘ 싫은 걸 넘어서서 무섭고 두렵기까지 했다. 그렇게 난 20대를 보내면서 글쓰기를 계속 회피해 왔다. 난 왜 글쓰기가 무서울까,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뭐지?
내 마음속엔 내가 주인인 관람차가 있다. 내가 허락한 손님들만 탑승할 수 있는 편파적인 관람차다. 단골손님으로 그림과 공예가 있다. 그에 반해 글쓰기는 매번 자기 순번을 기다리면서 서 있는 손님이다. 그것도 관람차와 어울리지 않게 양복을 입고 기다리는 손님. 후줄근한 차림의 주인인 나는 그 손님이 불편해서 탑승을 거부하는데 글쓰기는 다시 돌아서 줄 맨 끝으로 간다. 그러면 몇 년에 걸쳐서 다시 나에게 탑승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양복 입은 손님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내 관람차에 태우고 사진도 찍으면서 쾌적한 운행을 하고 싶은 게 맞다. 하지만 바람에 관람차가 요동칠 것 같고 태풍에 날아갈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다. 결국엔 다 예상과 허상일 뿐인데. 그 어떤 것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못할까 봐 불편하다고 피하는 어린 내가 계속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30대로 진입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이제 무서울 것도 별로 없다. ‘글쓰기를 잘하지 못할까 무서워?’ 아니다. 더 무서운 건 내 건강이고, 통장 잔고이며, 내 미래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서웠던 것들이 우습게 여겨지고, 안 무서웠던 것이 무서워지기도 한다. 글쓰기도 그만 피하고 더 늦기 전에 시작을 하는 게 맞는 선택이라고 느꼈다.
글을 배워야겠다고 어느 정도 결심이 섰을 때, 인스타 광고로 글쓰기 클래스가 보였다. 종종 마음속으로 ‘이런 거 배우고 싶다’라고 생각한 것이 핸드폰 광고로 뜨는데 난 좋다고 덥석 무는 편이다. 그렇게 냉큼 물은 글쓰기 클래스는 나에게 최고의 선택이 된다.
글을 배우면서, 쓰면서 느끼는 것들이 있다. 글쓰기는 확실히 머리가 터질 것처럼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분명히 어렵지만 내팽개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하루하루 전보다 더 머리를 굴리며 살아가게 된다.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도 뿌듯해진다. 글쓰기를 배워보지도 않고 40대, 50대를 맞이했다면 난 계속 아쉬워했을 것이다. 계속 글쓰기를 두려워했을 테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은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30대에 글쓰기를 태운 나의 관람차는 조금 흔들릴지언정 더 튼튼하고 빛나게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불편하다고 무작정 피하는 주인이 아닌 당당하고 대범한 주인을 가진 관람차로 멈추지 않고 나아가겠지.
-깊은 숲에'서' 이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