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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초 Nov 17. 2020

낙태





글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이를 지운다는 것.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죄라면 여자의 죄인지 남자의 죄인지, 그것이 죄가 아니라면 다른 생명을 죽였을때도 죄가 아니란건지.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는 무슨 죄인지. 낙태라는 글자는 수많은 의문을 달고 다닌다.


아이의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죄라는 말이 어느정도 맞을지도 모르겠다. 죽임을 당한 쪽이니까. 그렇다면 죽음이란 건 뭘까. 숨통이 끊어져야만 죽음일까. 몸 안에 한 순간도 원하지 않았던, 결코 감당할 수 없는 한 생명을 품고 위태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과연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철없는 밤이 데리고 왔을까. 사랑하는 연인이 데리고 왔을까. 예기치못한 사건이 안겨주고 갔을까.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여자의 벌이라며 세상은 너도나도 회초리를 들고 죄를 묻는다. 어째서 생겨난 생명인지는 사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죄를 씌우고 싶어할뿐.


고통.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사망. 그 누구도 아이를 지울때 행복한 마음이지 않을 것이다. 불안하고 불행하고 어째서 내게 이런 시련이 온 건지 끊임 없이 스스로에게서 문제를 찾을 것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것이다. 그곳에 가지 말걸. 그 사람을 만나지 말걸. 그 사람 말을 믿지 말걸. 그러지 말걸. 아이를 지우는 선택은 몸의 주인이 맞다. 지우기로 결심 하는 순간 여자의 신분은 임산부가 아닌 죄인이 된다.


왜. 죄인은 누가 만들었는가. 왜 죄인가.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으면, 그럼 그 사람은 무엇인가. 엄마. 뱃속에 생명이 자리하는 순간 여자의 운명은 그저 두 갈래로 나뉠뿐인가. 엄마 아니면 죄인. 어떤 선택을 하건 그건 몸의 주인의 몫이다. 이곳이 미혼모에게 관대한 세상인가. 관대는 커녕 평등조차 없다. 혼자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현실에 아이를 먹이기 위해 삶의 가장자리로, 위태롭게 걸어 나가는 여자를 이곳은 보듬어주고 이끌어주는 세상인가.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그게 불가능한 세상이다. 여자들이 죄인의 타이틀을 쓰지 않기 위해 어거지로 아이를 낳고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것이 이 세상이 원하는 일인가. 원치 않는 출산은 불행한 사람을 한 순간에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내가 처할 일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 함부로 재단하곤 한다. 나는 그런 일들에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의 고통, 죄책감, 위태로운 현실과 싸워야만 하는 절박함에 함부로 이름을 붙이고 죄를 묻는 것. 그것 또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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