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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신 Aug 10. 2021

프롤로그

'한 창 클 나이, 스물서른'을 시작하며


내가 심리학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철없던 시절 순전히 친구들과 제 시간에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리학교는 학부제로, 3학년 때 전공을 선택했었는데, 친하게 어울리던 친구 둘이 모두 심리학과를 원했다. 나는 사회학과를 염두해두고 있었지만 친구들이 심리학과를 가자고 약간 꼬시는 데다가, 냉소를 멋으로 알던 나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식으로 심리학에 발을 들였다. 그 대단치 않은 이유로 선택한 공부를 석사와 박사를 걸쳐 20년 쯤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거야말로 운명인걸 수도 있겠다. 


대학시절의 나를 철없다고 부른 것은 결코 자기비난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홍대를 매주 기웃거리며 좋아하는 음악에 심취하는 것이 내가 하는 활동 중 가장 성숙한 것이었다. 적어도 내 취향을 발전시키는 나름의 적극적인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흥미 없이 발들인 공부는 남을 위해 하는 것인 양,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이기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깊이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정해진 루틴대로 살아가는 기계처럼 일단 무언가 정해지면 그것만 간신히 해내고 그 외의 것들은 강렬히 거부적이었다. 방학 때 가끔 알바를 구하고, 학기마다 시간표를 정하는 것이 그 시절 인생의 가장 큰 변화의 중심이었다. 그 후엔 다시 일정대로 흘러가는 일상일 뿐이었다.


내 안에 나침반은 태어날때부터 없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마치 무언가가 끌어당기 듯 어떤 일에 열광하고 몰두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인생에 대한 호기심도, 공부에 대한 호기심도, 일이나 활동에 대한 호기심도 모두 없었다. 그저 삶이 주어졌으니 그 날 그 날의 일들을 의미없이 해내는 것 같았다. 세상으로부터 평가받고 베이고 아팠지만,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어쩐지 나와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아파하지도 못했다. 대신 응어리진 그 에너지들은 음악을 들으러 홍대밤거리를 헤매는데 사용되었다. 컴컴한 지하클럽에서 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뭐라도 된 듯 폼 잡고 있었지만, 실은 그저 누군가가, 혹은 그저 나를 쏟아낼 상황이 필요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건대, 나의 20대는 중고등학교 어느 시절보다 더 미숙하고, 수동적이며 동시에 공격적인 나날들이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자기이해의 부재와 진솔한 관계맺기 실패가 가장 주요했던 것 같다. 대범한 듯 행동하면서도 내면에는 항상 자기비난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때로 우쭐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성취, 외모, 성격..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차라리 그 열등감을 드러내고, 원망하고 자책하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무어라고 마주하면 죽을 것처럼 요리조리 피해다니기에 바빴다. 늘 아닌척, 괜찮은 척, 그럴싸한 척 하느라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다. 


Carlyanne McConnell on Twitter / Paintings about love and life by Shanti Shea An(위) from pinterest


자신을 바로 볼 수 없던 나는 인간관계 역시 피상적인 수준에서 그쳤다. 진짜를 내놓지 않은 사람과 누가 쉽사리 친밀해질 수 있겠는가. 오직 나를 버텨준 성숙한 인격의 소수만이 나의 사람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나의 이삼십대는 미숙했고, 불안정했으며, 이기적이었다. 중고생 시절 생각했던 어른이 이게 아니었는데.. 그 시절 일기장을 펴놓고 읽다보면 조금도 자라지 않은 나의 모습에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가슴 속의 허무함과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은 찜찜함...서러움...수치심은 지속되었다. 어쩐지 세상에 착붙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세상과 어정쩡하고 어색한 사이로 지내며 나의 청년기는 지나갔다. 


과거의 나이와 현재의 나이가 사회적으로 같지 않다는 이야기들을 종종한다. 지금의 30대와 과거 70,80년대 30대를 비교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외모적으로 현재의 30대가 훨씬 어려보일뿐더러, 영글지 않은 속을 반영하듯, 소위말하는 ‘어른미’가 흐르지 않는다. 나도 그러했던 것 같다. 내면의 미성숙과 물리적 나이, 육체적 성숙의 부조화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안을 만들어냈다.


세상에 뿌리내리고 번듯한 한 존재로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은 서른에서 마흔을 관통하는 나이 어디 쯤이 아니었나 싶다. 느긋이 걸을 수 있게 되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질문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듯 타인의 시선에 매몰되었던 사춘기, 초기 청년기가 지나고 나서였다. 나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추상적인 생각이 아닌 가슴아프고 생생한 경험으로 겪어내고, 세상 속에서 나를 볼 줄 알게 되고, 타인과의 연결감을 깨닫고,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 불혹을 한참 지나면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나이는 어른인데, 어른이 아닌 것 같다는.. 성숙을 꿈꾸는 사람들부터, 끊임없이 자기를 끌어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드러내는 사람들, 미해결된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현재가 발목잡힌 사람들, 머리로는 알지만 뜻대로 안되는 수많은 절망을 가진 사람들.  


나는 '한창 클 나이, 스물서른'을 통해 한 개인으로서, 심리학자로서 내가 서성대며 고민했던, 질문과 그 답(때로는 답을 얻는 과정중인 미결의 답)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인정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싶다. 스물, 서른은 아직 ‘한창 클 나이’라고..


2021.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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