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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신 Aug 13. 2021

타인의 눈에 매몰되지 말지어다

"한창 클 나이, 스물서른"

언제였을까요.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보게 된 것이.


아주 어린 시절의 저는 그냥 제 기분대로였던 것 같아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 맛을 즐거워하고, 엄마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기웃거리고, 우리집 강아지는 누워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고, 꽃은 어떻게 피고 지는지 생각하며, 날은 더운지 찬지 느끼며..저의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 같아요.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어요. 친구들과 교복을 입고 하교하는 중이었는데,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은 그런 날이었답니다. 왜, 꼭 토요일의 오후였을 것 같은 그런 날이요. 교복이 정숙함을 가져다준다지만, 그 나이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치마고 뭐고 내달리기를 즐기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걸으며 모든 머리칼이 성가심없이 바람결에 실려 넘겨지는 것을 사랑했어요.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라니, 이들은 마치 궁합이 잘맞는 친구처럼 느껴졌어요. 힘차게 걸으며 버스정류장을 향하는데, 맞은편에 친한 친구 한명이 저희 무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더라구요. 마냥 반가워 웃는 저를 향해 그 친구가 던진 말은 이랬어요.


“이마 좀 가려. 얼굴 커보인다.”


바람이 기분 좋은 손길로 싹싹 넘겨진 제 머리칼로 인해 환희 드러난 이마와 얼굴에 대한 말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맘때쯤, 다른 아이들은 슬슬 여드름 난 이마를 지키기 위해, 각진 턱을 숨기기 위해 머리카락으로 위장술을 펼치고 있었던 거죠. 그 친구 눈에 바람을 향해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제가 꽤나 못생겨보였나봐요.  


그 말은 저에게 적잖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날 그 순간, 저의 시점은 바뀌었어요. 영화에서 카메라가 급회전하며 주인공을 비추듯, '내가 세상을 보는 시점'에서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점'으로요.


그 친구가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도 자의식이 폭발하는 사춘기 시절이 다가오고 있던 거죠. 꾸밈없는 표정으로 고르지 않은 치열을 드러내며 깔깔대거나, 오직 편의로만 옷을 골라 입거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엉덩이를 내밀고 책상에 밑에 떨어진 지우개를 줍거나, 공원 벤치에 편한 자세로 널브러지거나, 버스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내가 먼저 살펴보고 있으니까요.


복도를 지나다가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길가의 쇼윈도에서도 나의 체형을 확인했습니다. 외모 뿐만 아니라 나의 말이나 행동, 표정 등이 남에게 어떻게 드러나지는지 늘 체크하곤 했어요.


남들이 나를 보듯, 나를 본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을까요. 성인기에 접어들어서도 타인의 시선에 매몰되어 살았던 것 같아요. 맛있는 것을 먹어도 그 맛은 반만 만끽되었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면, 흐트러지는 매무새를 정돈하며 있느라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길가에 꽃을 봐도, 한껏 향을 맡아보지 못하고, 바다에 거침없이 뛰어드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보송함을 지키기 위해 양말 한짝 벗지 못했습니다.


여유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연한 대처와 상황에 맞는 유머 같은 것은 사라지고 뻣뻣하고 기계적인 상호작용만이 남았습니다. 때로 스스로도 남의 눈을 의식하는 자신이 싫고, 뻔뻔하게 선생님께 우스개 소리를 늘어놓는 애들이나, 누구에게든 친하게 기대어 오는 애들을 보면 물 속 물고기처럼 자유로워 보인다는 생각에 부러움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남이 보듯 나를 보는 동안, 나에게서 넘쳐날 감각과 감정과 욕구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흩어지고, 생의 물기가 마르고 있었습니다.

Artwork – Barbara Flowers,  David Hockney_ The Arrival of Spring, Normandy(위) from pinterst


우리에게는 경험자아와 관찰자아가 있습니다. 삶을 경험하고 감각하는 자아를 경험자아, 그리고 나 자신과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자아를 관찰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있을 때, 글자를 따라 내용을 처리하고 이해하는 내가 있고, 책을 읽고 있는 나를 관찰하는 내가 있다는 겁니다.


어리고 미성숙한 기간동안 우리는 관찰자아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어린 아이를 떠올려보면 쉽습니다. 세상을 탐구하기 위해 시야는 오직 자기중심적이며, 관점의 전환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피아제의 세산실험을 보면 6,7세 이전의 전조적기 아이들은 타인의 관점을 전혀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대해 민감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보통 사춘기 전후 입니다. 그것은 평가와 인정, 혹은 사랑 받고자 하는 욕구와 관련있으나 같지는 않습니다. 관찰자아에는 자기애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측면도 포함되어 있어, 남을 의식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람인 척하는 것에 몰두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또한 자기비난 혹은 자기성찰을 활성화시키고 순간순간 자신을 되돌아보고, 때로는 채찍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관찰자아가 적절하게 역할하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잠자리에 누워 하루 중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며 이불킥을 하기도 하고, 뿌듯해하기도 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 건강한 방식으로 돌아보는 역할을 할 때입니다. 타인과의 관계 혹은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좀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기술을 리허설 할 수도 있구요. 지나치게 엄격한 삶을 살고 있는 경우에, 자기 자신에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관찰자아를 통해 보면, 건강한 연민이 올라와 삶의 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번아웃이 온 직장인이 있습니다. 상담에 와서 하루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상사와의 의사소통에서 오해가 있었던 일, 동기들의 질투와 시기, 누구보다 잘 해냈지만 부담스러웠던 발표 자리 등 입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몸도 지쳤으며 이제 모니터앞에 앉아있어도 집중도 되지 않습니다. 한창 성과를 내던 자신의 모습이 꿈만 같고 이제는 무기력하고 껍데기 같은 자신의 모습만 느껴질 뿐입니다. 연차를 쓰고 휴가를 다녀오려 하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일벌레라는 말이 듣기 싫어 연차를 내고도 집에서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늘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당히 하고 싶지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고, 몸이 쉬더라도 머릿속은 늘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로 가득차 있어 진짜 휴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이럴 때 하루 동안 직장에서 자신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은 치유적인 역할을 합니다. "모니터 앞에 앉은 자신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나요?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그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이런 질문을 통해 이런 대답을 합니다.


"불쌍해요.", "이제 그만 쉬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충분히 노력한 것 같아요"


자신에 대해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은 때로 경험에 파묻혀버린 건강한 자아를 깨우고 자신을 올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옵니다.


문제는 관찰자아가 파파라치처럼 늘 눈에 불을 켜고 있을 때입니다. 경험에 몰두해 감각하고, 사고하고, 배우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때조차 말입니다. 기대하던 친구와의 식사, 부스스한 채로 강아지와 나서는 아침 산책, 일이나 공부에 몰두해 골몰한 표정을 하는 순간 등 우리가 경험을 통해 감각을 깨우고 감정을 만나는 모든 때에 파파라치가 붙어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거리낌 없는 호탕한 웃음을 웃을 수도 없고, 멍때리기도 어렵고, 성과를 제대로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관찰자아와 경험자아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온전히 몰두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나를 점검할 시간도 필요합니다. 자신은 어떤 자아가 더 지배적인지 한 번 생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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