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완벽한 타인>, 비밀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는 영화
오래간만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습니다. 보고 나서 많은 생각 할 거리를 주는 영화였고,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정말 여운이 많이 남는, 그리고 보고 나서 “잘 만들었다.”라는 말이 나왔던 영화였습니다. 원래 글을 쓸 때 구어체를 잘 쓰지 않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영화를 보고 든 생각과 느낌을 좀 더 거리감 없이 전하고 싶어 구어체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줄거리를 스포 하는 것 또한 좋아하지 않지만 공간이 한정적인 이 영화의 특성상 줄거리를 언급하지 않으면 후기를 적는 것이 힘들기에 줄거리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예민하신 분들은 참고해주세요.
줄거리
영화는 남자아이들이 개기월식 날 모여 놀던 모습이 잠깐 나오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개기월식을 보기 위해 그들이 석호(조진웅)와 예진(석호의 아내, 김지수)의 집에서 부부동반 모임을 갖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모임 도중 예진은 모두 핸드폰을 상 위에 올려놓고, 저녁 먹는 동안 핸드폰으로 오는 모든 걸 공유하는 게임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게임을 하며 드러나는 비밀들과 그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영화는 진행됩니다.
‘완벽한’ 타인, 완벽한 ‘타인’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처음 떠올린 인상 깊었던 점은 막장 드라마 같은 스토리 전개와 별개로 이야기를 이끄는 배우들의 행동과 대사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지인들에 대한 가십거리로 대화하고(일명 “카더라”),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에 대해서조차 뒷담화하는 모습, 친구의 집들이에서 친구의 살림살이를 보며 쟤는 모습, 습관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가리는 모습 등, 영화는 이런 모습들을 결코 진지하고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배우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게 영화 전반에 깔아놓았을 뿐입니다. 이것들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현실임을 명시하는 것처럼요. 사실 실제로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자신을 포장하고 남을 판단하며 쉽게 대화거리로 삼는 행동들'은 우리로 하여금 영화를 보며 웃음과 동시에 멋쩍음과 찝찝함을 느끼게 합니다.
또 영화의 스틸컷들을 살펴보시면 (네이버 영화 '완벽한 타인' 소개 페이지 기준) 초점이 맞춰줘 있는 중심인물들과 함께 다른 인물들도 흐릿하게 들어가 있는 장면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피상적인 관계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하나같이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고, 같은 비중으로 화면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누군가는 초점이 나가 있거나,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거나, 혹은 다른 곳을 보거나, 뒷모습이 나와요. 모든 인물들이 한 장면에 다 같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씬은 개기월식을 보러 베란다에 나왔을 때 단체 셀카를 찍는 장면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셀카를 위한 핸드폰 카메라를 영화의 카메라 시선과 동일시해 배우들이 관객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연출해 더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장치들은 극 중 등장인물들이(정확히는 남자 캐릭터들) 어린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다는 설정과 함께 그들의 피상적인 관계를 더욱 부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제목이 참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완벽한 타인이란 말의 뜻은 완벽하게 남인 ‘타인’도 되고, ‘완벽해 보이는’ 타인도 됩니다. 영화 속 서로 가까워 보이는 그들은 서로에게 완벽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영화는 그 모습을 통해 그들이 완전하게(완벽하게) 타인임을 명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 또한 얼마나 스스로를 감춰왔고, 그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라는 생각이요.
비현실 속에서 현실을 비추는 거울
영화는 갈수록 극적으로 치닫는 인물들의 상황 속에서 개인의 ‘비밀들’이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우리에게 앞다투어 여러 가지 질문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각 인물들의 캐릭터 설정이 큰 역할을 합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무뚝뚝한 남편 태수(유해진)와 그를 뒷바라지하며 억압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며 글을 쓰는 수현(염정아), 속도위반으로 결혼했고 가장 완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마음을 닫고 의지하지 않는 석호(조진웅)와 예진(김지수),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막말을 많이 하는 변태로 나오지만 아이러니하게 앞과 뒤가 가장 똑같은(바람 피운 것과는 별개로) 준모(이서진)와 그를 믿고 사랑하는 어린 아내 세경(송하윤), 게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숨기며 살아왔던 영배(윤경호) 등, 이들의 배경을 바탕으로 비밀이 드러나고 얽히면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단순히 비밀에 대한 생각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들에 관한 고민할 거리도 던져줍니다.
영화는 결코 직접적으로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내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각각의 인물들이 숨겨왔고 감쳐왔던 자신들의 얘기를 꺼내고 외칠뿐이죠. 영화가 끝으로 갈수록 마치 극 중 개기월식으로 가려졌다 다시 드러나는 달처럼, ‘비밀이지만 거짓은 아닌 것들’이 모두 드러납니다. 그로 인해 상황은 난장판이 되고 그들 모두가 유지해왔던 보통의 ‘완벽한’ 삶 역시 파탄이 났지만 그걸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묘하게 후련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진이 제시했던 게임을 실제로는 하지 않았었고 그 모든 것이 진짜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평소와 같이 각자의 비밀을 간직한 채 모임을 끝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이 사실이 드러나기 전 모든 게 진짜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상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극 중 준모의 바람 행각이 드러나면서 세경이 떠날 때 결혼반지를 돌리는 데, 영화 ‘인셉션’에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게 해주는 팽이 토템처럼 계속해서 돌아갑니다.
영화 속에서 비밀이 모두 드러났지만 결국 현실 속 우리들은 비밀을 계속해서 간직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이, 감독은 영화 속에서조차 이야기를 현실로 다시 가져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영화 속 인물들의 마지막 모습에서 다시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결국 다시 ‘비밀’ 그리고 ‘관계’
그리고 ‘우리 자신’
혹자는 이 영화를 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서로 넘어선 안 될 선"을 얘기하기도 하고 "핸드폰이란 것이 나의 비밀을 많이 담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닐까"에 대해 얘기하기도 합니다만,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영화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직접적으로 답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과장되었지만 비현실적이지는 않은 어딘가에는 있을법한 묘하게 현실적인 캐릭터와 사건들로, 그저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비밀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표면 위로 가져올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인상적인 이야기들을 보여줍니다. 영화 전반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개기월식에서 가려졌지만 분명 존재하는 달처럼 우리의 비밀 또한 안 보인다 해서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는 점과, 각자의 삶 속에 감춰져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비밀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모습을요.
영화 속에서 비밀이 드러나자 파탄 난 가정 중 하나였던 태수와 수현은 비밀이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의 비밀을 스스로 돌아보며 반성 혹은 다른 선택을 하고 그들 나름대로 보통의 소소한 행복이 있는 삶을 이어갑니다. 반대로 준모는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는 실제에서는 계속해서 바람을 피웁니다. 비밀이 드러났을 때 오히려 서로에게 마음을 다시 열었던 석호와 예진은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 때는 계속해서 단절된 채로 살아갑니다. 영배 역시 계속해서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지극히 사적이며 적나라한 그들의 비밀들은 제각기 다른 상황, 다른 관계가 얽혀 다양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어떤 비밀은 상대를 그리고 나 자신을 다치게 하지만, 어떤 비밀은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나와 상대가 보다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영화는 비밀을 드러냄이 나에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결코 알 수 없음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동시에 떠올리게 합니다. 비밀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 비밀을 비밀로 유지한 채 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끝, 화면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순한 명제 같지만 그저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수많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하는' 다음의 글귀에서도 느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삶 개인의 삶 그리고 비밀의 삶"
우리 모두 완벽해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나를 포장하며, 이기심 때문에 혹은 나를 방어하기 위해 각자의 비밀을 안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그 비밀들이 언제든지 밝혀질 수도 있다는 것과 그 비밀들이 안 보인다 해서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사실 우리는 비밀을 밝히고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때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극 중 결국 모임이 난장판이 돼서 모두가 떠나간 후에, 마음을 닫았던 예진이 석호를 뒤에서 안을 때의 장면 속 그들의 초연하고 편안한 표정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난장판이 되며 파탄이 난 이야기의 끝에서 느꼈던 묘한 후련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내내 떠올리게 한 질문에 대한 저만의 답은 이렇습니다.
"비밀의 공개에 대한 선택권은 대부분 우리에게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비밀을 비밀로 남기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영화 자체의 의미를 제쳐두고라도, 제한적인 공간에서 배우들의 대화와 감정 교류만으로 영화가 진행됨에도 흥미진진한 몰입도를 유지했다는 점,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에 집중했고 그것이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휘황찬란한 시각 효과나 심오하고 어려운 상징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상징조차도 직접적인 영화의 표현법(예를 들면 영배가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하며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만 변태는 아니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영배는 준모를 바라보고 카메라의 시선 역시 영배에게서 준모로 옮겨갑니다.), 꽤나 막장인 스토리를 담으면서도 현실감을 녹여냈다는 점, 뭣보다 관객들을 빵 터지게 함과 동시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블랙코미디적 요소들 등.(유해진 배우님이 정말 웃겼습니다.) 이것들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삽니다.
공적인 삶, 개인의 삶, 그리고 비밀의 삶.
그럼 당신은 당신의 비밀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writer 이맑음
문화예술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