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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리 Jun 19. 2024

제주에 사람이 없다

<녹음실 제주>로 무작정 떠난 우리의 이른 여름휴가

남편이 여름휴가를 써야 하는 시기가 왔다. 보통 대한민국의 회사원들은 7-8월 성수기에 여름휴가를 떠나곤 하는데, 어딜 가나 사람 많고 비싸기만 한 때에 땀 뻘뻘 흘리며 여행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일찍이 휴가를 쓸 수 있다 하여 6월 안에 다녀오자 합의를 보았고, 어딜 갈지 여행지를 정하던 중 제주에 사는 지인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제주 남원에서 카페와 스테이를 같이 운영하는 미선님이다. 요즘 제주에 사람이 없단다. 언제나 웨이팅이 기본인 런던베이글뮤지엄이나 프릳츠 성산도 가면 기다리지 않아도 될 정도라 하니 제주 관광객이 얼마나 감소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의 한적한 동네 남원읍 신흥리에 자리한 카페 <알맞은 시간> [사진 ©봉봉리] 

많은 이들이 제주도를 가는 대신 베트남과 일본으로 여행을 가고 있다. 사실 나만 하더라도 이번에 제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작년 여름휴가를 일본 홋카이도로 가고 재작년엔 베트남 사파에 갔듯, 이번에도 일본과 베트남 중 고민했을 것 같다. 베트남은 물가가 저렴하고, 일본은 지금 엔화가 싸니까. 그리고 현재 제주는 비싼 관광지라는 오명을 안고 있지 않은가. 정작 나조차도 '제주도 갈 돈으로 일본 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사람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제주를 가기 가장 알맞은 때가 아닐까? 미선님과의 대화 이후 우린 그렇게 예정에 없던 제주로 여름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탐스런 수국과 달큰한 치자 향이 진동하던 6월의 제주 [사진 ©봉봉리]

1년 반 만에 찾은 제주도. 탐스런 수국이 곳곳에 피어 있는 6월의 제주는 오랜만이었다. 차를 렌트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한 시간 동안 임대 간판이 붙은 빈 건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 커뮤니티에 장사가 안되어 제주 매물이 많이 올라온단 소식을 듣긴 했는데, 이렇게 많은 임대 간판을 보고 있자니 씁쓸했다. 옛 한창때의 제주를 생각하면 사람도 차도 많이 줄어든 게 체감되었다. 어딜 가나 '허씨 차량(렌트카)'이 도로에 즐비하던 제주도였는데 말이다. 우리가 3박 4일 동안 머물게 될 <녹음실 제주>는 감귤농사로 유명한 제주 남쪽의 남원읍 신흥리에 있다. 이 동네는 제주의 다른 곳보다도 더욱이 인적이 드문 곳이다. 왠지 여행자라고는 우리뿐일 것 같은 그런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네.

카페 <알맞은 시간> 옆에 있는 스테이 <녹음실 제주> [사진 ©봉봉리]

숙소 바로 옆엔 2018년부터 호스트인 미선&종인 부부가 운영해 온 카페 <알맞은 시간>이 자리하고 있다. 에어비앤비에 입사하고 처음 기획한 로컬 콘텐츠 지역이 제주였는데, 그때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이 카페를 다뤘더랬다. 엔터 업계에 오래 몸 담고 일했던 부부는 치열했던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제주로 무작정 이주했다. 감귤밭으로 둘러싸인 돌창고를 지금의 멋진 카페로 개조했고, 그 어렵다는 무농약 감귤 농사에도 열심이셨다. 어떤 해엔 손수 수확한 감귤 한 박스를 서울로 보내주시기도 했는데, 새콤한 감귤 맛과 다정한 그 마음이 잊히지 않는다.

<녹음실 제주>의 안락한 침실과 감각적인 다이닝 공간 [사진 ©봉봉리]

농약을 치지 않고 감귤 농사를 짓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번에 제주에 내려가서 듣게 되었다. 부부는 코로나 기간 동안 손 많이 가던 감귤밭을 싹 다 밀어버렸고, 그 자리에 독채 두 채를 지었다. 한 채는 부부가 사는 집이고, 다른 한 채는 여행자를 위한 스테이 <녹음실 제주>다. 2022년 스테이가 오픈하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혼자 가서 하룻밤을 보낸 적 있다. 호스트 부부가 엄선한 음반을 듣기도 하고, 그간 다 읽지 못한 책 한 권을 끝내기도 하고, 조용히 일기를 쓰기도 하며 나 홀로 알찬 시간을 보냈었다. 다음에 다시 오면 남편을 데리고 오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거의 2년 만에 같이 오게 되었다.

앞선 여행자들의 기록들과 호스트가 손글씨로 쓴 다정한 스테이 안내서 [사진 ©봉봉리]

소리나 글을 기록한다는 뜻의 녹음(record), 나무의 그늘이란 뜻의 녹음(greenery), 그리고 마음을 녹인다는 뜻의 녹음(melting). 여러 의미를 지닌 <녹음실 제주>는 감각적인 공간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무엇보다 게스트를 위한 경험 설계가 무척이나 사려 깊다. 샴푸 바와 고체 치약 등 제로웨이스트를 최대한 실천하기 위해 고려한 제품들부터 안락한 침구, 주인 호스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음반들, 매일 새롭게 채워지는 커피 원두와 차, 오트밀 요거트까지. 호스트가 손수 적은 녹음실 제주 안내서를 읽다 보면, 밖으로 노다니지 않고 이 공간을 그 누구보다 알차게 누리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든다.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숙소엔 고체치약과 비누가 있다. 자투리 비누는 챙겨갈 수 있게 공병도 준비되어 있다. 원두와 오버나이트 오트밀은 매일 새롭게 채워진다. [사진 ©봉봉리]

휴가이긴 하지만 틈틈이 업무를 처리하던 남편은 이전에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책상 자리를 업무 공간으로 만들었다. 일을 하지 않을 때엔 그간 바빠서 하지 못했던 게임도 원 없이 하며 그 누구보다 행복한 여름휴가를 보냈다. 책상을 차지한 남편 덕에 나는 이번엔 LP플레이어와 음향기기가 있는 소파에 앉아 주로 시간을 보냈다. 평소 읽고 싶던 책도 읽고, 부부가 엄선해 고른 음악도 골라가며 들었다. 내가 가져온 책뿐만 아니라 서가에 꽂혀 있던 호스트의 책들도 펼쳐 보았는데, 제주의 고사리 한철인 4월을 그림으로 그린 김성라 작가의 만화 에세이 <고사리 가방>이란 사랑스러운 책을 발견한 행운도 누렸다.

책과 글에 몰입할 수 있는 책상 공간과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소파 공간 [사진 ©봉봉리]

이 숙소에 머물 때 무엇보다 좋은 건 바로 옆에 있는 카페 <알맞은 시간>이다. <녹음실 제주>에 머물면 1박마다 카페에서 내려주는 커피가 무료로 제공되는데, 매일 아침 주인장이 내려주는 커피와 프렌치토스트로 느긋이 하루를 시작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올리브페스토를 곁들인 폭신폭신하고 달달한 빵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카페도 숙소와 마찬가지로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고 있다. 테이크아웃을 할 때 플라스틱 용기를 쓰는 대신 기증받은 텀블러를 빌려준다. 덕분에 이곳에 머무는 나흘 동안 텀블러를 요긴하게 빌려 썼고, 제주를 떠나는 날 반납하고 왔다.

게스트에겐 바로 옆 카페 <알맞은 시간>의 커피가 1박 당 한 잔씩 무료 제공된다. 테이크아웃 할 땐 일회용기 대신 기증받은 텀블러를 빌려준다. [사진 ©봉봉리]

3박 4일 동안 별다른 계획 없이 <녹음실 제주>에 머물다가 동네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치고 계곡에 풍덩하고, 테니스 치고 바다에 풍덩을 반복했던 이번 휴가. 낚시 좋아하는 남편 따라 야간 한치 낚시도 갔는데, 코미디처럼 우리만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선장님이 적선해 준 한치 4마리와 문어 1마리를 종인&미선 부부와 나눠 먹었다. 달큰한 치자향이 진동하는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치와 문어 투하해 먹은 라면 맛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나 홀로 고요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좋았고, 짝꿍과 도란도란 보내도 좋은 <녹음실 제주>.  2022년 가을과 2024년 여름을 이곳에서 보내보았으니, 다음엔 겨울 혹은 봄에 머물러 볼 수 있길.

(우리가 직접 낚은 건 아니지만..) 낚싯배에서 바로 가져온 한치와 문어를 투하한 라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진 ©봉봉리]




녹음실 제주
· 주소: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리 274-1
· 링크: https://blog.naver.com/melting_room_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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