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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리 Jan 19. 2023

대중목욕탕의 추억

몸과 마음의 묵은 때가 밀려나가는 시간

새해를 맞아 동네 목욕탕에 다녀왔다.

구정을 앞두기도 했고, 하루종일 스키를 타느라 쑤신 몸을 이끌고 겸사겸사 간 것이다. 1년 전 송파로 이사 온 이후 두세 군데를 거쳐 정착한 여성전용사우나다. 옛날엔 가락시장에서 밤새 일하고 와서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여성들로 북적였지만, 지금은 코로나 영향으로 옛날만큼 많이 오진 않는다 한다. 그래도 사물함은 자주 오는 단골손님들의 목욕바구니로 늘 빼곡하게 차있다. 그리고 목욕탕 옆에 2천 원을 더 내면 이용할 수 있는 한증막이 하나 있는데, 누워서 몸을 지지며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여성들이 늘 많다. 송파의 모든 가십은 이곳을 거치겠지..

실제로 사랑방요금 6시간에 7,000원이라고 적혀있다. 커뮤니티 사업의 중심에 있는 이곳.. [사진 ©봉봉리]

성인이 되어 목욕탕에 오기 시작한 후론 전문 세신사에게 세신을 받는다. 가끔 기분 내고 싶을 땐 큰맘 먹고 7,000원을 더 내고 오이마사지도 받는다. 그러면 생오이를 갈아 내 얼굴에 듬뿍 얹어주는데, 나중엔 얼굴도 꼼꼼히 씻겨주고 잠깐이나마 두피도 마사지해 주신다. 내가 다니는 송파의 목욕탕에는 두 명의 세신사가 있는데, 한 분이 대장이고 다른 한 분이 2군인 듯하다. 대장 이모는 늘 검은 팬티와 브라를, 좀 더 젊어 보이는 조선족인 2군 이모는 밝은 계열을 입고 계신다. 두 분 모두에게 세신을 받아봤지만, 나는 2군 이모가 더 좋다. 구석구석 야무진 손길이 느껴진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해 새로운 이태리타월을 개시한 것일까.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건지 매서운 때타월이 살갗을 스치며 금세 벌게진다.


툭툭. 이모가 손으로 무심하게 내 몸을 치면 몸의 위치를 바꾼다. 전면으로 있다가 왼쪽 측면, 오른쪽 측면, 엎드려, 그리고 다시 똑바로 누워. 이모의 무심한 손 터치에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내 몸뚱이처럼 이곳 여탕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 암묵적인 룰이랄까. 세신을 하기 전엔 몸을 충분히 불려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냉탕에 들어가지 말라 한다. 내가 너무 더워서 몸에 찬 물을 찌끄리기라도 할 새면 어디선가 세신사 이모가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신다.. 수건은 두 개를 주는데, 하나는 목욕 후 몸을 닦는 용도고 다른 하나는 탕이나 사우나에 들어갈 때 머리카락이 흐르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용도다. 빨래를 사우나에 널면 안 되며, 오일마사지를 하고 탕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다. 많은 것들을 불허하는 빨간펜들이 목욕탕 곳곳에 붙어있다. 오랜 시간 깨끗하게 탕을 유지하는 목욕탕의 운영 노하우겠지.



명절을 앞두고 목욕재계를 하는 것은 우리집의 연례행사였다.

일요일이면 늘 할머니의 손을 잡고 시장통 중앙에 떡하니 자리한 대중목욕탕에 가곤 했는데, 명절 전후는 언제나 대목이었다. 우악스러운 동네 아줌마들이 바글바글한 목욕탕에서 나의 어머니와 할머니 듀오는 매의 눈으로 자리를 용케 찜했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우리만의 루틴대로 몸을 씻고, 뜨끈한 탕에 담그고, 냉탕에서 첨벙첨벙하다가 사우나에 들어가고, 그리고 때를 밀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보통 당신 손주들의 때를 직접 박박 밀곤 하셨지만, 꼭 명절을 앞둘 때만큼은 세신사에게 맡기셨다. 연중 가장 중요한 때엔 프로페셔널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걸까. 그래서인지 때밀이 이모들에게 전신의 때를 구석구석 밀릴 때만큼은 늘 경건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


보통 때를 밀 땐 할머니가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을, 어머니가 나를 전담했는데, 남동생은 열 살이 된 이후부터는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이후론 나도 다 컸다고 스스로 몸의 앞 부분을 때수건으로 밀고 있으면,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랜덤으로 내 등을 맡곤 하셨다. 내 어머니의 때 미는 손길은 빈틈없고 가차 없지만, 할머니의 손길은 늘 부드러웠다. 사춘기가 찾아오며 나는 더 이상 목욕탕을 가지 않았다. 신체의 변화가 있기 시작하며 남들 앞에서 내 알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 어머니와 할머니더라도 말이다. 내가 목욕탕에 가지 않더라도 할머니는 매주 가시곤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목욕 시간이 그립다. 때를 밀며 나는 조잘조잘 학교 이야기를 하고, 내 할머니와 어머니 모녀는 남편, 시댁, 직장, 며느리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온갖 수다를 떨곤 했었다. 그 가십 엿듣는 재미도 있었는데.


목욕탕을 다시 좋아하게 된 건 대학 때였다. 포항에 있는 기숙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자취를 하던 선배들을 따라 처음 포항온천을 가게 되었다. 그중 영남언니는 포항온천에 자주 가는 목욕러임을 자부하며 목욕바구니를 들고 나타나 자기만 따라오라고 했다. 그땐 머리가 다 컸을 때라 그런지 더 이상 내 알몸을 남들 앞에 보이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 사람들 앞에 서니 되려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어릴 적 가던 동네목욕탕과는 비교가 안 되는 꽤 큰 규모였다. 무엇보다 물이 정말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뭔가 미끌미끌한 물이 내 피부도 매끈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어릴 적엔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의 할머니가 집에 있는 욕실을 두고 왜 매주 목욕탕을 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늘 뜨겁다고 불평하던 열탕은 더 이상 뜨겁지 않고 시원했다. 열탕의 시원함을 나도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피로가 쌓일 때면 늘 목욕탕으로 향했다.



여행을 가면 늘 그 나라, 그 도시의 대중목욕탕을 경험하는 걸 좋아한다.

발트해에서 수영을 하고 사우나를 오갈 수 있는 핀란드 헬싱키의 공중목욕탕, 프랑스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야외 온천, 운치 있게 눈 맞으며 뜨끈한 물에 몸 담그는 일본의 노천탕,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온천, 세계에서 가장 큰 해수 온천인 아이슬란드의 블루라군, 독일의 남녀공용 사우나까지.. 그 나라의 목욕탕을 가면 그 나라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아이슬란드는 곳곳에 온천수가 흐르는 탕이 많았는데, 묵었던 에어비앤비마다 개인 자쿠지나 입주민을 위한 공용 스파들이 거의 다 구비되어 있어 여행을 하는 2주 내내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 동쪽 끝에 자리한 Vök Baths. Urriðavatn 호수와의 경계가 모호하게 설계되어, 따뜻한 온천과 차가운 호수를 오가며 목욕을 즐길 수 있다. [사진 ©봉봉리]
프랑스 피레네 산맥에 있는 공중목욕탕 The Roman Baths of Dorres. 여긴 물이 그다지 뜨끈하진 않았는데, 경치가 다한 곳이다. [사진 ©봉봉리]
산속 깊숙이 자리한 200년 된 교토의 전통료칸 모미지야(もみぢ家). 자연 속 아침의 고요한 목욕시간은 그 뒤로도 몇 번 더 이곳을 방문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사진 ©봉봉리]
아이슬란드 서쪽엔 그 유명한 블루라군이 있다. 용암이 굳은 바위에 생기는 물질인 실리카(Silica)가 녹아 있어 온천수가 푸른 우윳빛깔을 띈다. [사진 ©봉봉리]
아이슬란드에선 묵었던 에어비앤비마다 개인 자쿠지나 입주민을 위한 공용 스파들이 많이 설비되어 있어 여행을 하는 2주 내내 노천을 즐길 수 있었다. [사진 ©봉봉리]
외관부터 정겨운 이곳은 도쿄 키요스미정원 부근에 자리한 공중목욕탕 타츠미유(辰巳湯)다. 샴푸가 없어 옆의 아주머니께 부탁했다. 샴푸 조또 오네가이시마스.. [사진 ©봉봉리]

이렇게 많은 목욕 문화를 경험하다 보니 언젠가 나도 나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단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유서 깊고 물 좋은 목욕탕들이 많다. 얼마 전 드라마 <슈룹>에서도 나왔던 조선시대 왕실의 휴양지 온양온천부터 내가 제주에 갈 때면 방문하는 탄산온천, 나의 할머니가 1년에 한 번씩 당신 친구들과 설레며 떠났던 부곡하와이, 그리고 하일권의 만화 <목욕의 신>의 모티브가 되었던 부산의 허심청까지. (아쉽게도 50년 넘게 자리를 지켰던 서울 홍제동의 마을탕은 코로나로 폐업을 했다 한다.) 하지만 좀 더 자연과 어우러져 편안하게 몸과 마음의 릴랙싱을 돕는 대중목욕탕은 찾기 어려운 것 같다.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를 넘어 나 자신을 돌보는 의식과도 같다. 쌓이고 쌓인 고단함과 긴장이 풀리고, 몸과 마음의 묵은 때가 밀려나가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바로 목욕탕이다. 마음의 편안함을 주는 자연친화적인 거점에 작지만 알찬 대중목욕탕을 언젠가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바다, 강, 숲 모두 좋다. 사우나 안에서 바깥의 자연을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하고, 안팎을 자연인의 모습으로 자유로이 오갈 수도 있어야 한다. 오기만 해도 내 모든 심신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면 좋겠다. 목욕에 마실 거리도 빠질 수 없다. 내가 꿈꾸는 목욕탕에는 겨울에는 따뜻한 코코아와 뱅쇼가, 여름에는 차가운 화이트와인과 당근주스가 있다. 물론 어린이 손님에겐 바나나우유가 국룰이다. <목욕의 신>에 나오는 신의 손을 가진 최고의 세신사도 있어야 한다.. (이쯤 되니.. 꽤나 구체적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다른 이들이 꿈꾸는 목욕탕, 그리고 저마다 가진 목욕탕의 추억도 궁금해진다.




예전에 브런치에 핀란드 헬싱키의 공중목욕탕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다. 일본인 아티스트 네네 상과 그의 핀란드인 건축가 남편이 함께 만든 곳인데, 발트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어 사우나 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 밖으로 나가 자연에 몸을 내던질 수 있다. 네네 상과 꽤 오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한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목욕탕은 모든 이들이 제로(0)가 되는 공간이다. 모두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육체와 정신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곳. 모든 가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사색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나중에 나는 목욕탕 주인이 되어 있을까? 그렇다면 그 옆엔 테니스장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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